•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살아야 하는 한국과 이스라엘의 逆轉 드라마  
     
     自主국방의 나라 이스라엘 紀行(9)
    趙甲濟    
      
     국가 지도부의 정보 오판은 재앙을 초래한다 
     
     이스라엘에서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그 우수한 정보기관들이 왜 1973년 10월전쟁을 미리 감지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開戰(개전) 직전에 여러 번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군은 비상을 걸었으나 훈련으로 밝혀졌다. 비상이 걸리면 예비군이 동원되고 산업 활동이 큰 타격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誤判은 정보수집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해석의 잘못 때문이었다. 군정보기관은 여러 징조를 접하고서도 전쟁은 아니란 판단을 했으나 모사드는 전쟁임박이란 판단을 내렸다. 골다 메이어 총리와 엘라자르 참모총장 등 지휘부는 軍정보기관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開戰 이틀 전인 10월4일 軍정보기관은 거의 결정적인 첩보를 수집했다. 이집트 최고사령부가 예하부대에 대해 라마단 금식을 중단하라고 지시한 통신문을 가로챘던 것이다. 이슬람 교도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의식인 라마단 기간의 禁食을 중단시키는 것은 비상사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4일 밤엔 소련 수송기가 날아와서 시리아와 이집트에 있는 군사고문단 가족들을 철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그래도 이스라엘 정부는 이것이 전쟁을 의미한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전쟁 前夜인 10월5일 오후 5시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非아랍 어느 나라의 통신을 감청, 이집트·시리아 兩 전선에서 곧 기습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국가지도부로 보고되지 않았다. 10월6일 새벽 비로소 유럽에 급파된 모사드 部長(부장)은 고급 정보요원으로부터 전쟁이 6일 오후 6시에 개시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開戰은 6일 오후 1시55분이었다. 이스라엘 국가 지도부의 오판은 戰死 2500명, 부상 7500명의 인명손실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10월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군사적 승리는 거두었으나 외교戰線에선 守勢에 몰려 결국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게 된다. 6·25 때도 일선에 있던 국군정보부대는 전쟁을 정확히 예측했으나 육군본부와 경무대는 판단기능이 마비돼 있었다.
     
     국가 지도부가 국가적 大事(대사)에서 오판을 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 국가 지도부의 정보능력은 그 지도부의 총체적 직무능력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낸다. 金泳三 정부의 정보능력은 北核위기 때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다. 1993년 초 기자가 만났던 안보·외교팀의 핵심인물들은 모두 북한이 미국의 압력에 年內(연내)로 굴복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서울 포위 하의 決死항전은 가능한가? 
     
     이스라엘은 10년 뒤에나 현실로 나타날까 말까 한 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과 核개발 징조를 벌써 제1의 위협요인으로 받아들이고 외교·군사·정보 등 다방면의 대책을 수립, 실시하고 있다. 한국도 1980년대 초에 이미 북한의 核개발 의도를 감지했으나, 일부 정치인들의 주장처럼 그 위협을 과장하기는커녕 ‘미국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는 자세로 침묵해 버렸었다. 그때 일찍 손을 썼더라면 지금과 같은 對北 저자세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40억 달러의 지출도 필요 없게 되었을 것이다. 40억 달러는 安保의식 태만의 代價이기도 하다.
     
     1994년 우리 군이 실시한 워 게임(War Game) 결과에 의하면 인민군이 철원방면에 主攻(주공)을 놓고 기습 남침할 때 우리 軍은 의정부까지 밀린다고 돼 있다. 開戰 한 달 뒤에 미군의 증파로 반격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開戰 한 달 안에 한국군은 전사 약 10만 명, 부상 약 50만 명의 피해를 입을 것이란 계산이 나왔다고 한다. 한 주한미군 정보관계자는“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과 소련군 사이의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병력과 火器의 밀집도에 비추어 동부전선보다 더 심한 파괴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기자가 만난 한국-미군 군사전문가들은 대부분 북한이 또 전쟁을 걸어올 때는 화학무기까지 쓸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학무기를 쓸 배짱이 없으면 전쟁을 애초에 결심할 수 없을 것이다”는 분석이었다. 對北군사정보 전문가인 P씨(예비역 장성)는 “군사적인 계산만으로는 북한이 남침하더라도 이길 수 없다”면서“다만 정치적인 변수가 하나 있다”고 했다.
     
     “북한이 기습 남침할 경우 서울을 포위할 수는 있습니다. 한강 이남으로 진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국군이 미군의 증파와 함께 반격을 개시하면 통일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포위한 다음 휴전을 제의했을 때 남한 정부가 決死抗戰을 포기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인민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럴 경우에 미군이 우리를 도울 명분도 상실됩니다.”
     
     장군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남한의 유권자들은 그런 정부를 선출하지 않도록 눈을 비벼둘 필요가 있다. 한 여당 국회의원은 “지금의 나라 분위기라면 북한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국민 모두가 자신이나 가족이 무사한 쪽으로 선택할 것이다”라고 했다.
     기습남침으로 戰勢가 불리하게 돌아갈 경우 가장 먼저 백기를 들자고 주장하는 것은 권력기생적인 기득권층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많은 보수세력은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이 아니라 權力의 향방을 자신의 행동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좌익세력보다 더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영달과 가족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金正日 치하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런 기회주의 때문에 한국의 보수층은 소수의 좌익세력에 의하여 휘둘리고 있으며 위선자들과 선동가들의 공세에 주눅이 들어 있는 것이다.
     
     中東의 脫냉전이 이스라엘 평화공세의 배경
     
     이스라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은 점이 있다. 모두가 소신에 차 있어 語法이 단순명쾌하다. ‘그런 면도 있지만…’식의 兩是論·兩非論的 話法은 없다. 그들은 또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30초 질문에 답변은 30분이다. 그들의 대화에는 많은 교양이 있다.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기자가 예루살렘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홀리데이 인 호텔 라운지에서 만난 외무부 정보센터의 분석관 엘리 아비단氏도 그러했다. 그는 한 시간 반가량 기자를 앞에 놓고 설명이 아닌 웅변을 했다.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의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PLO, 요르단, 시리아와 평화협상을 감행할 수 있던 근본 이유를 中東지역의 脫냉전에서 찾았다. 소련의 붕괴 이후 시리아와 PLO는 가장 중요한 배후세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특히 시리아는 소련식 무기체제를 채택하여 소련의 부품공급에 의존하고 있었다. 소련의 붕괴로 시리아의 무기체제는 지금의 북한처럼 고철화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확실한 對시리아 군사력 우위를 확보,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공격적인 평화공세를 펼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6일전쟁 때 쟁취한 골란高原(고원)을 시리아에게 돌려주되 이곳을 비무장지대화하고, 더 나아가서 현재의 시리아 국경 너머에서도 비무장지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깔고서 평화협상에 임하고 있다. 이처럼 공격적인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의 강력한 군사력이다. 이스라엘이 1977년에 숙적인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6일전쟁에서 빼앗은 시나이 반도를 반환했기 때문이다. 즉 병사들의 피로써 확보한 땅을 평화와 맞바꾼 것이다. 
     
     역사의 감동적 逆轉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 그리고 요르단江의 西岸(서안)지역을 빼앗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는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지금 총리 라빈이었다. 라빈 총리는 지금 자신이 빼앗은 땅을 팔아 평화를 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감동적인 逆轉이다. 평화협상의 실무책임자인 페레스는 核무기 개발의 책임자이기도 했는데 이스라엘이 보유한 그 核무기가 또 과감한 평화공세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對아랍투쟁에서 선봉에 섰던 라빈과 페레스가 평화를 부르짖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민들은 오히려 안심하고 있다.
     
     닉슨 대통령이 對중국 접근 등 과감한 데탕트 외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는 강경론자·현실주의자·보수주의자에 의하여 성취된다는 것은 역사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金泳三 대통령도 통일문제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려면 먼저 확실한 反共(반공)과 보수의 입장에 서서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고 북한당국의 환상을 깨뜨려야 할 것이다.
     
     제2차 한국전쟁이 터진다면 그것은 북한의 기습에 의해서 비롯될 것이다. 기습은 항상 성공한다. 문제는 한국이 최초의 강타를 당하고도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삼풍백화점처럼 그 길로 붕괴해 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서울이 북한 방사포의 일제사격과 스커드 미사일의 화학탄 공격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우리 국민들은 과연 死生결단의 의지로써 결사抗戰(항전)을 결의할 수 있을까. 그만한 자기희생 정신이 과연 있는가를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지금처럼 ‘미국이 지켜주겠지’, ‘安保는 공기처럼 공짜이다’, ‘나와 가족만 무사하면 만사 OK이다’ 하는 식으로 대처할 때 한국군의 초기 패퇴는 후방의 붕괴-대한민국의 종언으로 이어질 것이다.
     
     삼풍백화점 소유주의 형편없는 안전의식을 비난하지만, 수도권을 북한의 장거리포와 스커드미사일 사정권 안에 인질처럼 노출시켜 놓고도 그 방어망 설치의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고 있는 국가 지도부의 안보의식은 더욱 형편없는 수준이다. 이스라엘 같았으면 북한에 대해 장거리포의 後進(후진)을 요구하고 듣지 않을 경우엔 예방폭격으로써 위협을 제거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같았으면 아웅산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김일성 부자를 암살했을 것이고, 對北경수로·對北 쌀 지원 대신에 F-16편대를 보냈을 것이다. 
     
     極東과 極西의 악수
     
     아쉘 나임 駐韓 이스라엘 대사에게 기자가 물은 적이 있다.
     “이스라엘은 아랍국가들과 평화를 약속한 이후 오히려 진짜 위기를 맞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인간이 늘 긴장 상태 하에 있어야 자신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天才(천재)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이지요. 우리는 오늘이 항상 생애의 마지막 날일지 모른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나임 대사의 이 말은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란 도전이 있었기에 남한 사람들은 태만하지 않고 항상 긴장하면서 자신의 정열을 불태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둑 아래 사는 사람들처럼 하루하루를 맹렬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자가 이스라엘에 가서 느낀 감정도 그런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電流처럼 통하는, 같은 주파수대의 감응이 있었다. 비슷한 과거뿐 아니라 비슷한 오늘을 살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極東과 極西는 멀지만 가까운 나라임에 틀림없었다.
     
     이스라엘엔 入國하기도 어렵지만 出國하기란 더욱 어렵다. 벤구리온 공항에서 짐을 부치기 전에 실시하는 보안 검사를 시간 내에 마치려면 세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서 보안검사를 하루 전에 받는 제도가 있을 정도이다. 보안요원이 승객과 일일이 일문일답을 하는 데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짐을 다 풀어야 한다. 기자는 귀국行을 텔 아비브-프랑크푸르트(이스라엘 국영 엘 알 항공사 편)-서울(대한항공 편)로 잡았다. 엘 알 여객기의 機內紙(기내지) 첫 장엔 ‘여행자의 기도문’이 실려 있었다.
     
     ‘…하늘을, 바다를, 육상을 여행하는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강하게 해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다잡아주소서.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만이 우리의 안식처이나이다. 아멘.’
     
     지중해를 종단하는 네 시간 반의 비행 끝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安着(안착)하자 승객들은 조종사를 위해 박수를 쳤다. 엘 알 항공기는 공항 탑승구에 바로 붙지 않고 외딴 곳에 정지했다. 기관총을 탑재한 세 대의 장갑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의 국경 수비대였다. 장갑차의 엄호 아래 기자는 버스에 타고 공항 건물로 향했다.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했던 독일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나마 그들에게 속죄하고 있는 듯했다.
     
     이스라엘 특공작전 略史(약사)
     
     아이히만 납치에서 엔테베 작전까지
     ●1960년 5월 이스라엘 해외담당 첩보기관 모사드는 하렐 부장의 현지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 국영항공회사 엘 알(EL AL)편으로 데리고 왔다. 유태인 학살의 한 主役(주역)인 前 나치 비밀경찰 간부 아이히만은 공개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 5월3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 형법은 다른 범죄에 대해선 사형을 금지하고 있으나 유태인 학살 범죄만은 예외이다. 아이히만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에서 사형된 유일한 인간이다.
     ●이스라엘과 프랑스의 우호·협력관계는 195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알제리아 독립운동 조직에 대한 정보를 프랑스에 제공했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다. 核무기의 비밀개발에도 두 나라는 협력했다. 이집트의 나세르에 대한 공동전선도 형성했다. 그러나 드골의 재집권 이후 알제리아가 독립해 버린 뒤 협력의 기반이 약화되었다. 1967년 6월전쟁 前夜 드골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하여 先制공격을 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으로 大勝하자 드골은 對이스라엘 무기 금수조치를 취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합동공작을 벌여 스위스가 만들고 있던 프랑스의 미라지 전투기 설계도를 훔쳤다. 이것을 바탕으로 만든 전투기가 케피어(Kfir)이다. 1967년 크리스마스 이브 날 이스라엘軍의 무기조달처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프랑스의 쉘부르그 항구에 있던 미사일 발사함 5척을 공해상으로 빼돌려 1970년 새해 첫날에 이스라엘 하이파 항으로 몰고 왔다. 이 배들은 對이스라엘 금수조치에 의하여 주문국인 이스라엘로의 인도가 거부돼 있었다. 이스라엘은 노르웨이 석유회사가 구입하는 식으로 위장한 다음 특공대를 선원으로 변장, 승선시킨 뒤 배 5척을 소매치기한 것이다.
     ●1969년 12월 이스라엘 공수부대의 특공대 66명은 세 대의 헬기에 나눠타고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영토 내로 약 60km쯤 진입했다. 사막에 착륙한 그들은 소련제 P-12 레이더 기지를 습격, 2.5t 레이더를 해체하여 헬기에 싣고 돌아왔다. 소련정부는 최신무기가 이스라엘 손에 넘어간 데 화가 나서 이집트에 대한 최신 고급무기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
     ●1976년 7월 이스라엘 특공대는 네 대의 허큐리스 수송기에 나눠 타고 아프리카 깊숙이 날아갔다.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납치한 에어프랑스 여객기엔 246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고 그중 77명이 이스라엘 시민이었다.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6일째 억류돼 있던 이들 인질을 구출한 엔테베 작전은 기발한 착상(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으로 변장한 이스라엘 군인이 수송기에서 지프차를 타고 내리는 바람에 공항경비병들은 외국 순방 중이던 아민이 귀국한 것으로 착각했다)과 대담한 공격, 그리고 최소의 인명손실로 하여 그 뒤에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완벽한 드라마였다.
     ●1981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은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용으로 건설 중이던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했다. F-16, F-15 편대는 사우디아라비아 상공으로 우회하여 이란 쪽으로부터 공습을 단행하였다. 이라크 측에선 한동안 이란 공군기의 공습을 받은 것으로 착각했다.
     ●1985년 10월1일 이스라엘 공군 F-15 편대는 튜니시아에 있는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본부 건물을 폭격, 75명이 죽었다. 공중급유를 받아 가면서 1900km를 날아와 폭격한 이스라엘 편대는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귀환했다. 이 폭격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가 키프러스에서 세 명의 이스라엘人을 죽인 데 대한 보복이었다.
     ●1986년 10월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는 이스라엘의 비밀核개발에 참여했던 기술자 모르데차이 바누누의 증언을 게재하여 이스라엘이 이미 核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모사드는 미인계를 써 바누누를 로마로 유인한 뒤 선박 편으로 데리고 왔다. 바누누는 반역혐의로 재판에 넘어가 징역 18년을 선고받아 지금도 복역 중이다. 변호인들은 바누누의 폭로를 反核양심선언으로 몰고 가려 했으나 이스라엘 언론이 납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유력 일간지 하아레츠의 칼럼은 ‘민주국가라 하더라도 그런 폭로를 한 인물은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바누누가 아직도 송환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우리는 정부에 대해서 왜 그를 내버려 두고 있느냐고 추궁해야 한다’고 했다.
     ●1988년 4월16일 이스라엘 특공대는 튜니시아의 해안에 상륙,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의 주요인물인 아부지하드를 그의 집에서 암살한 뒤 철수했다. 이스라엘 군은 이 작전을 지휘하기 위하여 전자전 통제기를 지중해 상공에 띄웠다. 당시 이스라엘군 참모차장 에후드 바락(뒤에 총장)이 이 비행기에 타고 지휘하고 있었다. 이 전자 정보기는 특공대가 침투한 지역의 전화 및 무전시설을 마비시켜 특공대의 탈출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