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空軍과 정보를 최우선으로 
      
     自主국방의 나라 이스라엘 紀行(2)
    趙甲濟    
     

     남자답고 여자다운 이스라엘 女軍 
     
     이스라엘에서 갖게 된 두 가지 여성像은 女軍과 ‘주이시 마더’(Jewish mother)이다. 뭔가 줄 것이 없나 해서 안달인 유태인 어머니들. 그들 중의 한 여성 오프라 여사는 이번 취재여행 중 기자가 만난 유태인 중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외국인 상대의 관광가이드 자격증을 가진 기갑사단 교관 출신의 오프라 여사는 네 자녀를 둔 어머니이다. 이틀간 그녀가 모는 밴(Van)을 타고 예루살렘, 나사렛, 갈릴리 호수와 골란高原을 돌아다녔다. 운전을 하면서 창 밖으로 펼쳐지는 이스라엘의 풍요로운 자연과 피비린내 나는 역사에 대해 웅변에 가까운 해설을 쉴새없이 쏟아내는데 그 고급영어의 교양과 재치뿐 아니라 그 해설에 담겨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국토와 역사에 대한 긍지와 사랑이 나에게까지 전염되어 오는 것이었다.
     “저 병원은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제가 자란 키부츠가 있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창립하셨지요.”
     “저 언덕에선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닌 전투가 벌어졌지요.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사자왕 리처드의 십자군을 격파함으로써 중동이 그 뒤 1000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기에 아직 불타버린 채 버려져 있는 차량들은 독립전쟁 때 고립된 예루살렘을 구출하기 위해 活路(활로)를 개척하려고 했던 우리 부대가 아랍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되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자리에 둔 것이에요.”
     “저 水路는 요르단江 물을 남쪽으로 나르는 것인데 시리아 軍은 골란고원에 대포를 갖다 놓고 수시로 수도파이프를 때렸답니다.”
     
     그의 운전솜씨는 하나의 예술이었다. 예수의 성장도시 나사렛의 그 좁고 붐비는 뒷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데 감탄을 연발하자 오프라 여사는 즐거운 奇聲(기성)을 질렀다.
     “아이 필 마이 카!”(I feel my car!)
     ‘나는 내 차를 내 몸처럼 느낀답니다’란 뜻이겠는데 그녀의 악수하는 손은 억세고 성격은 급하며 행동은 빨랐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묘하게 조화시킨 이스라엘 여성, 오프라 자신이 바로 新生국가 이스라엘 역사의 한 具現者(구현자)란 느낌이 들었다. 이스라엘 취재를 끝내고 김포공항에 돌아와 모범택시를 탔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고속도로를 시나이 사막 탱크戰場으로 착각한 듯 무섭게 달리고 빵빵거리며 추월하는 이스라엘의 군사문화적 교통문화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도 운전을 하는 기보니氏는 “이스라엘에서 운전하기가 더 겁난다. 한국 운전자들은 양보심이 있는데 우리는 그게 없다. 그러나 운전기술은 우리가 좀 낫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여섯 번의 전쟁을 치렀다. 독립전쟁, 1956년 수에즈 전쟁, 1967년 6일전쟁, 1967∼1970년의 지구전(War of Attrition), 1973년 10월전쟁, 1982년 레바논 전쟁. 이 전쟁 사이사이의 局地戰과 지금도 계속되는 테러로 사망한 사람까지 합쳐서 약 2만 명이 戰死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한다(이스라엘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약 150만 대, 1994년의 교통사고 사망자는 528명·부상자는 3만5500여 명). 유태인들은 천성적으로 한국인들처럼 조급한 편인데 전쟁과 더불어 살면서 兵營化된 사회 분위기에 적응하려다 보니 더욱 조급해져 난폭운전으로 흐른 게 아닐지 모르겠다.
      
     강한 空軍과 早期경보 능력이 핵심 
     
     이스라엘의 육군·공군은 고도로 무장돼 있다. 主力 무기의 수는 현역군 규모에서 4배쯤 많은 한국군과 맞먹을 정도이다. 이는 기동성의 확보가 승패의 결정적 요인이란 인식을 바탕으로 조직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1994년 레바논 국경지대나 가자지역 등에서 작전 중 피살된 이스라엘 군인 수는 37명이었다. 일반시민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66명이다. 이스라엘 군대(경찰군 포함)가 죽인 팔레스타인 사람은 114명, 이스라엘 민간인 손에 죽은 팔레스타인 사람은 38명이다. 한편 이스라엘 군대 내에서 사고로 죽은 군인은 1994년 한 해에 25명, 자살자는 43명이었다. 합계 68명. 약 네 배 규모의 현역군을 가진 한국군에서 매년 사고로 죽는 군인들이 300여 명, 세계 최고의 군대라는 이스라엘 군대의 사고율과 비슷한 수준이니 우리 군대사고에 대해서 너무 과민할 필요가 없겠다.
     
     지난 50년간 이러한 '전쟁의 생활화' 속에서 이스라엘을 지켜온 이스라엘 국방군, 즉 IDF는 앞에 잠깐 소개했듯이 그 구조나 전략개념, 무기체계가 독창적이다. 소련식도, 미국식도 아닌 이스라엘式이다. 압도적인 人力과 武器를 가진 사방의 敵과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군대를 만들 것인가 하고 머리 좋은 민족이 IQ를 총집결한 결과물이 IDF이므로 여기엔 분명 배울 점과 참고점이 있을 것이다.
     
     좁은 국토를 戰場으로 내주지 않기 위해서는 戰場을 敵國 영토 내에 펼쳐야 한다. 早期경보에 따른 先制공격이 필수적이다. 이스라엘의 國力으로 볼 때 장기전은 불리하다. 따라서 뛰어난 정보수집능력, 강력한 공군과 기갑부대 그리고 신속한 동원예비군이 등장하게 된다. 이란 물리학의 공식은 이스라엘 전략의 기본이다. 전투력(F)은 무장력(M)이 가진 속도(V)의 제곱에 비례한다. 즉 속도가 전쟁승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얘기다. 군사조직에서 속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단·편대·함대의 이동 속도일 뿐 아니라 국가의 대응속도가 더 핵심이다. 敵의 전쟁企圖를 빨리 파악한 뒤 국가를 총동원 체제로 신속히 전환할 수 있도록 하는 정보수집·판단능력이 속도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은 군대로 갔고, 그들 중에서도 최고의 人材가 공군과 정보조직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2大조직이 있다면 공군과 모사드(해외담당 정보기관)일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空軍을 ‘또 다른 군대’라고 했다. 空軍에 대한 특별대우를 모두가 양해하고 있었다.
     
     공군과 정보능력의 강화는 人名손실을 줄이는 결과를 낳는다. 6일전쟁(1967년)과 걸프戰(1991년)은 본질적으로 空軍이 결정적 역할을 한 전쟁이었다. 勝者 쪽의 死傷率이 가장 낮은 전쟁이기도 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거의 비슷한 전략 환경 하에 있다. 수도권이 군사분계선에서 가깝다는 점, 국토가 좁다는 점, 특히 소련식 무기체제와 군대(시리아와 북한)를 상대하고 있다는 점, 人名 손실의 최소화를 목표로 한 전쟁개념의 필요성, 조기 경보체제의 死活的 중요성이 그것들이다.
     최근 한국정부의 지도부에선 이스라엘과 한국이 처한 安保환경상의 이러한 유사성에 착안하여 이스라엘 자주국방의 노하우를 연구·참고·도입하려는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란-북한 커넥션’ 저지가 이스라엘의 제1國政목표  
     
     1994년 12월 라빈 총리의 訪韓 이후 金泳三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군사·무기 체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올해 들어 安企部와 모사드의 최고 책임자가 상호방문하여 정보협력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류 방안을 의논했음이 이스라엘에서 확인되었다. 한국군의 고위층 인사들이 이스라엘을 찾는 횟수도 늘고 있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는 이미 이스라엘의 기술지원을 받아 無人정찰기를 개발하기로 했다.
     
     한국-이스라엘의 安保 협력을 촉진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 계획 때문이다. 북한은 노동1호와 대포동1호(이들 명칭은 韓·美 측에서 붙인 것이지 북한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를 이란의 자금지원에 의하여 개발하고 있다. 동해에서 발사실험을 한 적도 있는 노동1호는 설계 사정거리가 1400km. 대포동1호는 다단계 로켓과 고체 연료를 쓰는 대륙간 탄도미사일로서 사정거리가 4000km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둘 다 아직 實戰배치 단계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노동1호, 대포동1호의 개발에 대해서는 안기부와 모사드뿐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 정보기관도 예의 주시하면서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1992년 러시아 정보기관은 북한에 들어가려던 러시아 미사일 과학자의 입국을 금지시키고 북한에서 활동 중인 러시아 기술자들을 철수시켰다. 이들에 대한 조사에 의해 북한이 러시아 과학자들에게 4000km 사정거리의 미사일 개발을 의뢰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그 정보는 관련국에 의해 공유되었다. 이즈음 모사드는 安企部(現 국정원)에 노동1호의 설계도 정보를 제공했는데, 이 미사일이 核탄두 운반용일 가능성을 높여 주는 정보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집트, PLO, 요르단과 잇따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시리아와는 협상단계에 들어간 상태이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가와는 급속히 화해 분위기로 가는 마당에 이란이 잠재적 敵國 제1호로 등장하고 있다고 그들은 보고 있다.
     
     이란이 추진하고 있는 핵무기 개발과 북한이 개발하여 이란에 팔기로 한 核폭탄 운반용 장거리 미사일이 결합되면 이스라엘에 대하여 엄청난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다. 이란은 인구 6000만 명, 면적이 한반도의 8배인데다가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정권을 장악, 對이스라엘 테러를 조종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파괴를 국가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이스라엘 측의 시각이다. 국가 잠재력에 있어서 중동 제1인 이란, 그것도 과격한 원리주의자의 손에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이 들어가는 것을 국가의 존망을 걸고서라도 막겠다는 결의를, 기자는 이스라엘 安保관계자들과의 연속 인터뷰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의 한 정보관계자는 “현재로선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매달리는 형편이다. 對北정보를 아무래도 우리가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한국정부는 1994년 12월 텔아비브에 대사관을 개설했고, 이스라엘은 1992년 서울의 테헤란로에 그들의 대사관을 재개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직후 한국정부가 아랍 산유국가들로부터 석유를 안정적으로 사들이기 위해 부득이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냉각시킨 이래(그 뒤 이스라엘은 駐韓대사관을 철수, 日本대사관이 한국 관련 업무를 代行해 왔다) 20년 만에 두 나라는 다시 밀월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現단계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은 對北정보 부문에선 이미 협력체제를 가동시키고 있다. 그 다음으로 협력 가능성이 큰 분야로 꼽히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창적인 무기체제의 수입 및 기술이전 부문이다.
     
     특히 군사 대치상황이 한국과 비슷한 이스라엘의 군사정보수집체계에 대해 한국 측은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의 국영 放産업체 라파엘社도 이스라엘 정보시스템을 한국에 수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담당부서를 조직하는 등 의욕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미국의 태도이다. 武器체제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이 협력하는 것을 한국군이 미국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하여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하여 견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연간 30억 달러의 미국원조(그중 18억 달러는 군사원조)를 받으면서도 군사부문에선 自主노선을 걷는 데 성공한 나라다. 이스라엘이 그런 노하우를 한국에 전하여 바람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을 미국이 갖게 된다면 복잡하게 될 것이다. 그 반대로 이스라엘의 협력을 발판으로 삼아 미국內 유태인 세력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은 한국정부가 하기 나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