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승에서 제자로 다시 만난 박정희(朴正熙) 준장

    이렇게 힘찬 전진이 있는 가운데서도, 일부 교관들과 학생들 간에 시험문제를 팔고 사는 부정행위가 가끔 일어나 퇴교 당하는 학생들과 육대를 쫓겨나가는 교관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어느 교관이 시험문제를 팔아먹고, 어느 교관이 깨끗하고 불의와 싸우는지를 잘 알았다. 그리고 청렴하고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교관들에게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내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정의파 학생 가운데 한 명이 박정희(朴正熙)  준장이었다.

  • ▲ 故 박정희 전 대통령 ⓒ 연합뉴스
    ▲ 故 박정희 전 대통령 ⓒ 연합뉴스

    학과 강의 중간의 휴식시간에는 교관과 학생들이 같은 휴게실을 사용했다. 이 휴식시간에 교관과 학생들은 학과에 관해 못 다한 질문과 답변도 하고, 이런저런 사적인 대화도 나누면서 휴식을 즐겼다. 학생 박정희 준장은 말수가 적어서 휴식시간에 장기를 두던가, 아니면 담배를 피우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교관에게는 말을 걸어 올 때가 종종 있었다.

    그 분은 육군사관학교에서 나의 스승이었다, 전술학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강직하고 실력 있는 우수한 교관으로 널리 알려져 나는 그 분을 존경하고 있었다. 8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육군대학교단에 서게 되고, 그 분은 학생 신분이 되어 옛 제자의 군사학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이대용 중령,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 유학시험에 합격을 했다면서? 축하해. 언제 떠나나?”
    “감사합니다. 각하. 오는 7월에 떠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5개월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에 나는 유학을 떠나지 못했다. 유학출발 직전 육군본부로부터 X-레이사진에 좌측 폐가 나쁘게 나왔다면서 나 대신 보결로 있던 모 대령이 돌연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내 왼쪽 폐에는 11년 전에 앓다가 완치된 건성늑막염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 건강은 완전무결하게 좋은 상태였다. 나는 육군본부의 석연치 않은 조치에 묵묵히 따랐고, 훗날 다시 시험에 합격하여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에 의 유학의 꿈을 실현시켰다.

    ◆ 육군대학 학생감으로 부임한 김재규(金載圭) 대령

    육군대학의 발전을 위해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화제를 뿌리며 김재규(金載圭) 대령이 육군대학의 학생감으로 부임해왔다. 김재규 대령은 송요찬(松堯贊) 중장에 의해 무능장교로 분류된 장교였다. 김재규 대령이 전방사단에서 부사단장 직에 있을 때, 제1군사령관 송요찬 중장이 사전 예고 없이 불시 방문을 했다. 때마침 사단장이 부재여서 김재규 대령이 사단 현황을 브리핑 했으나, 매우 부실해서 송요찬 중장이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이에대해 김재규 대령은 답변을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이때 송요찬 중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1979년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 검증하는 모습. ⓒ 연합뉴스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1979년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 검증하는 모습. ⓒ 연합뉴스

     “너같이 무능한자는 필요 없으니, 24시간 내에 짐을 싸서 내 관할지역 밖으로 나가라.”
    김재규 대령은 짐을 챙겨 제1군지역에서 쫓겨 나갔다. 눈앞이 캄캄해진 김재규 대령은 육군대학 총장인 이종찬 중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한국전쟁 중, 김재규 중령이 사단참모를 지내고 있을 때 이종찬 장군은 그의 사단장이었다. 이종찬 장군의 부하 장교 평가 기준은, 우선 돈에 깨끗해야 하며 나라를 위해서 전쟁터에서 죽을 수 있는 사생관을 확고히 확립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이 능력이었다. 제아무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뚜렷한 국가관·사생관이 없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부정행위를 하고, 요령을 피우는 더러운 자는 군장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

    그러한 기준에서 볼 때, 김재규 대령은 군에서 쫓아낼 대상이 아니라고 보고 육군대학 학생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얼마 후에는 김재규 대령을 장군자리인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보직시키고, 기어이 그를 준장으로 진급 시키는데까지 힘을 써서 별을 달아주었다. 이종찬 중장은 모든 일은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며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지휘관이므로, 이런 일을 사사로운 시각에서 했으리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오직 평가의 기준이 송요찬 중장과 달랐을 뿐일 것이다.

    하지만 김재규 대령의 장군 진급에 대한 부정적 뒷이야기는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거론되었다. 집무실에서 부하참모로부터 장군 진급자 명단을 받아 읽어 내려가던 최석(崔錫) 중장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서더니 “이런 일이 있나, 원 세상에. 김재규가 장군이 되다니....... 살다보니 별꼴 다 보네. 뭐, 김재규가 장군이 돼? 정말로 별꼴 다 보네......”하면서 뒷짐을 지고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고 한다. 최석 중장의 김재규 대령에 대한 평가는 송요찬 중장이 내린 평가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이따금 교수단장을 수행하여 부총장실에 가서 김재규 대령에게 내가 작성한 시험문제를 설명하기도 하고, 한국 지형으로 전환한 교재에 대한 설명을 하기도 했다. 내가 본 김재규 대령은 부하들의 합리적인 건의를 잘 받아주고,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해 주는 차분하고 인자한 상관이었다. 그러나 군사지식은 매우 미흡했다.

    김재규 대령은 이렇게 온화하고 인자하면서도 드물게 ‘팩’하고 돌발적으로 화를 내는 성깔이 있다고 김봉준(金鳳俊) 대령이 나에게 말해준 적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박정희 준장이 제5사단장으로 있을 때, 김재규 대령은 그 예하 제36연대의 연대장을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느 하사관이 수렵금지 명령을 위반하고 총으로 꿩을 쏴서 잡았다. 이때 마침 미군 고문관이 연대장실에서 김재규 대령 및 부연대장 김봉준 중령과 대화 중이었는데 함께 이 총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잡은 꿩을 손에 들고 걸어오는 하사관이 보였다. 미국 고문관이 떠난 후, 김재규 대령은 꿩을 총으로 쏜 하사관을 불렀다. 그 하사관이 나타나자 연대장 김재규 대령은 몹시 흥분한 듯 비호같이 달려들어 구둣발로 하사관의 무릎을 힘차게 여러 번 올려 찼다. 하사관은 쓰려졌다. 옆에서 보고 있던 김봉준 중령은, 온화하고 인자한 김재규 대령에게 저렇게 모질고 표독스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 "임자가 떠나면 서울철수작전 계획은 누가 만드나"

    1959년 박정희 소장이 제6군관구 사령관 재직 시, 육군대학을 이미 떠난 나는 그분의 작전참모를 할 기회가 있었다. 제6군관구 사령부의 작전참모로서, 당시에는 아주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되는 서울철수작전 계획을 작성하는 작업을 막 시작했다. 그런데 제2군단장 김형일(金炯一) 소장이 나를 제2군단 작전참모로 전입 요청하는 전문을 육군본부를 통해 제6군관구 사령부에 보내왔다. 이에 대해 박정희 소장은 서울 철수작전계획 작성을 위해 나를 떠나 보낼 수 없다는 회신을 육군본부를 통해 제2군단장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에게 “임자는 안 돼, 못 가. 임자가 떠나면 서울철수작전 계획은 누가 만드나”고 했다.

    군단 작전참모는 대령 직책이고, 군관구 작전참모는 중령 직책이다. 내가 영전되어 가는 길을 막으면서까지 나를 신임해주는 박정희 소장이 고마우면서도 대령 승진의 기회를 놓치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두터운 신임을 받으면서도 박정희 소장의 장충동 저택을 한 번도 찾아가 본 일이 없다. 그래서 육영수(陸英修) 여사의 얼굴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반 후, 나는 전방에서 연대장을 하고 있었다.  11월 초순 겨울을 알리는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나를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부르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김종필(金鐘必), 강신탁, 김형욱, 오치성 등 육군사관학교 1기 후배인 대령들이 강력히 밀고 있으며, 박정희 의장이 내 의사를 타진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거절했다. 정치에 대해서는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나는 군에 남아서 능력을 발휘하며 선구자 대열에 끼고, 나라 위해 군인 본연의 길을 걷고 싶었다. 다행히도 약 10일 후, 그 자리에는 이후락(李厚洛) 예비역 준장이 보직되었다. 그 후 6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간 박정희 대통령과는 서신 왕래도, 만나본 적도 없었다.

     

  •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1979년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 전 대통령 시해사건 현장 검증하는 모습.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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