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 다투다가 상대가 너무 강하여 세(勢)가 불리해지거나, 어쩔 수없는 형편이 되면 도망을 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비유하여 '삼십육계(三十六計) 줄행랑'이라는 표현을 많이들 하시지요. 여기서 말하는 삼십육계는 중국에서 예전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병법의 정수를 모은 필사 형태의 책을 가리킵니다. 전쟁에 쓸 수 있는 서른여섯가지의 책략을 말하지요. 그러나 이 책은 경서나 사서처럼 정통 취급을 받지 못해 정식 출판된 적은 없다고 합니다.

  • ▲ 김충수 전 조선일보 부국장 ⓒ 뉴데일리
    ▲ 김충수 전 조선일보 부국장 ⓒ 뉴데일리

    이 책에 나오는 책략들을 살펴보면 숫자가 낮을수록 고급책략이고, 숫자가 높을수록 저급한 책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책략들은 승전계(勝戰計), 적전계(敵戰計), 공전계(功戰計), 혼전계(混戰計), 병전계(倂戰計), 패전계(敗戰計)등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계마다 6가지 계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으뜸으로 치는 제1계는 '만천과해(瞞天過海)'라 하여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너가듯 은밀하게 내일을 도모하라"는 뜻으로, 제4계 이일대로(以逸待勞 쉬다가 피로에 지친 적과 싸우는 타이밍 계략) 등과 함께 여섯가지 필승의 승전계(勝戰計)로 칩니다. 그런가하면 상황이 불리할 때 쓰는 패전계(敗戰計)로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31계 미인계(美人計 미녀를 이용하여 적을 속이는 계략) 등 여섯가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 전략이 모두 실패했을 때 쓰는 최후의 방책이 바로 제36계 주위상책(走爲上策 전략상 후퇴하는 책략)인 것입니다.
    삼십육계 주위상책(三十六計 走爲上策)이 처음 인용된 것은 남제서(南齊書) 왕경칙전(王敬則傳)이라고 합니다. 성격이 포악해 정적을 모두 죽였던 제나라 황제 명제(明帝)에 불안을 느낀 회계(會稽) 태수 왕경칙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建康)을 향해 물밀듯 쳐들어갔습니다. 이때에 황제 쪽에서는 왕경칙이 도망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 말을 들은 왕경칙은 껄껄 웃으며 "단(檀) 공은 여러 가지 계책 중, 도망치는 것이 상책(三十六計 走爲上策)이라 했다지. 너희들도 빨리빨리 도망치는 게 상책일 거야."하며 단도제(檀道濟·'36계 도망치는 게 상책'임을 강조했던 송나라 명장)가 위군을 피했던 것을 빗대어 말했답니다. 결국 반란은 실패하여 왕경칙은 제나라 군사에게 잡혀 도망도 못치고 목이 잘렸지만, 그가 말한 '삼십육계'의 비화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도모하고자 하는 삼십육계는 힘이 약할 때 전략적으로 일단 피했다가 힘을 기른 다음에 다시 싸우는 것이 옳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며, 호랑이를 만나서도 맞짱 뜨겠다는 무모함을 경계한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의미는 퇴색하고, 오늘날에 와서는 그 뜻이 많이 바뀌어 무조건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비겁한 행위’를 지칭하는 말처럼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삼십육계'는 냉혹한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한 좋은 방편의 하나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