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신령(新寧)·화산(華山) 일대에서 20일간 격전을 치르고 북진하여,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함경남도·평안남도·평안북도를 전전하면서 싸웠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안남도·황해도를 거쳐 경기도 용인까지 밀려왔다가, 중공군을 밀면서 다시 북진했다. 1952년 초에는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서 금성(金城) 앞산인 553고지 일대에 대대 병력을 배치하고 중공군과 금강산 철도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 중공군이 보내 온 엽총으로 꿩 사냥에 나서다

    서부전선에 있는 판문점에서는 유엔군측 대표와 공산군측 대표가 휴전회담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소규모 전투는 있었지만, 155마일 전선은 피아간에 방어진지 구축에 힘을 기울이는 일시적 소강상태를 이루었다. 방어진지 정면에는 지뢰도 매설했다. 이 지뢰밭에 멧돼지나 노루 같은 짐승이 들어가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군용 소총보다도 짐승에 대해 명중률이 월등히 높은 미국제 반자동 5연발 엽총이 일선 보병대대에 한정씩 보급되었다. 실탄은 멧돼지를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는 굵은 산탄(散彈) 이었다.

    그 엽총을 553고지 정상에 있는 대대장 호(壕) 속으로 가져 온 장교는 대대보급관 박문환(朴文煥) 중위였다. 납탄은 사람을 살상하는 실탄으로 사용할 수 없게 국제법에 규정되어 있어 중공군과의 전투에서는 엽총을 사용 할 수가 없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매일같이 포격전이 전개되고, 중대·소대 단위의 공방전은 기습적으로 감행되었다.

    서로 포로를 붙들어가고 붙들어 오느라 투덕거렸으니 멧돼지나 노루 같은 큰 산짐승들은 벌써 이 지역을 떠나 북쪽에 있는 구(舊) 단발령이나 금강산 쪽으로 도망을 갔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곳에 큰 산짐승들은 도망갔지 아직까지 남아 있을리가 있나, 중공군에게 이 엽총을 쏴대면 국제법에 의해 큰 문제가 일어날 것인데, 위에서 공연히 쓸데없는 엽총을 보내왔군 그래”하였다.

  • ▲ 꿩 ⓒ 연합뉴스
    ▲ 꿩 ⓒ 연합뉴스

    박문환 중위가 “대대장님, 꿩들은 도망가지 않고 바로 저 계곡에 많이 있습니다. 이 엽총으로 꿩 사냥이나 하시지요”하고 권했다. '꿩' 하면 나는 어렸을 때 고향에서 눈 내리는 밤에 들은, 정든 옛집을 찾아왔다가 죽어버린 가엾은 꿩과, 흥정산에서 코주부 씨의 코에 부딪쳐 덜덜 떨다가 숨이 끊어진 불쌍한 꿩 생각이 늘 되살아났다.  그러나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살벌한 전쟁터에서 1년 반 동안 혈투를 벌이다보니 거칠대로 거칠어져, 꿩 사냥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질 만큼 모질어져 있었다.

    “그래? 엽총 쏘는 재미가 어떤가 한번 꿩에게 실험이나 해볼까.”

    나는 허리에 권총을 차고 손에는 엽총을 들고 553고지 서북방 계곡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네 명의 사병이 뒤따랐다. 이들은 내가 꿩 사냥을 할 때, 중공군 방향을 경계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때는 늦은 오후, 눈 쌓인 대지 위를 짧은 겨울 해가 힘없이 비치고 있었다. 나와 경비병들은 꿩 사냥터에 도착했다.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계곡이 기다랗게 동북쪽으로 펼쳐져 있는 양쪽의 산비탈 밭에는 8인치 포탄들이 떨어지면서 만들어진 큼직큼직한 구덩이가 이곳저곳에 파여있었다. 그리고 계곡 한 가운데에는 여름철에만 물이 흐르는 폭 2미터 가량의 개울이 있었고, 개울 언저리에는 덤불이 무성한 곳도 있었다.

    나는 그 덤불 속에 꿩들이 있을 것 같아 그곳으로 접근해갔다. 과연 꿩들은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푸드등, 푸드등, 푸드등… 하며 20여 마리가 날아가 버렸다. 꿩의 종류는 들꿩 이었다. 엽총의 유효사거리 밖에서 꿩들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나는 사격을 하지 않았다. 꿩들은 군인들로부터 여러 번 사냥을 당해 생존의 비결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대대가 오기 전에 중공군이 이곳을 여러 달 동안 점령하고 있었다. 중공군들로부터 쉴 새 없이 시달림을 받은 꿩들은, 총 가진 군인들을 피하는 데 이골이 난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덤불 속에 낙오된 꿩이 있는가 하고 뒤져보았으나 꿩은 없고, 뜻밖에도 동태처럼 꽁꽁 언 중공군 시체가 물 없는 개울과 덤불속에 여러 구 있었다.

    2개월 전에 우리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일 때 중공군이 버리고 도망친 모양이었다. 보병대대는 이러한 시체들을 매장 또는 화장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상급 지휘관에게 보고만 하면 된다. 이들 처리 문제는 상급 부대에서 담당한다. 나는 이를 연대본부에 보고하기로 했다.

    ◆ "어째 우리 둘의 만남은 이렇게도 악연입니까?"

    나는 덤불숲을 떠나 꿩들이 날아간 솔밭으로 이동했다. 내가 솔밭 가장자리에 가자 꿩들은 또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떤 꿩은 재빠르게 이리저리 기어서 소나무 사이로 내빼 버리고, 또 어떤 꿩은 푸드등 날아서 순간적으로 알씬하고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소나무 가지들이 가려서 조준 사격은 불가능했다. 내가 있는 곳은 작은 소나무들이 밀생하고 있었으나, 산능선 쪽으로 올라갈수록 소나무가 듬성듬성 떨어져 있었다.

    나는 작은 소나무들이 많이 있는 곳에 일단 엎드렸다. 그리고 소나무 사이를 기어 다니던가,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꿩을 살폈다. 날씨는 매섭게 차가웠으나 하늘은 맑고 바람이 불지 않아 사방이 고요했다. 자주 들려오던 포성과 총성도 이때만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디선가 가볍게“바스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바짝 낮추고 소나무 사이로 위를 올려다보니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마른 풀포기가 있었고, 그 풀포기 위에 솔가지 하나가 포탄을 맞은 듯 떨어져 있었다. 그 속에 꿩 한마리가 숨어 있었다. 소나무 밭이지만 가랑잎도 있었는데, 꿩이 가랑잎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서서히 총구를 꿩 쪽으로 향하였다. 엽총의 총신을 소나무 밑동 오른쪽에 바짝 붙여대고 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엽총의 개머리판이 내 오른쪽 어깨 앞부분에서 들썩했다. 그와 동시에 돌덩이가 굴러내려 오듯 빠른 속도로 물체가 굴러내려 오더니 소나무에 걸려 멈추었다. 그 물체는 내가 쏜 꿩이었다.

    꿩은 주둥이는 동쪽을, 꽁무니는 서쪽을 향한 채 마치 알을 품은 어미 꿩 모양으로 땅 위에 차분히 엎드려 있었다. 내 눈과 꿩의 눈 사이의 거리는 불과 약 30센티미터, 눈이 서로 맞닿았다고 표현 할 수 있을 만큼 지근거리였다. 꿩은 눈망울이 말똥말똥 살아 있었다. 그러나 몸은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숨 가쁘게 할딱거릴 뿐이었다. 꿩의 심장과 허파는 아직도 멀쩡한 것이 분명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 깨끗하고 맑은 꿩의 눈망울이 나에게 “너무하셨습니다. 어째 우리 둘의 만남은 이렇게도 악연입니까?”하고 심적원감(心的遠感= 텔레파시Telepathy)을 보내오는 것 같았다. 나는 꿩에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죽음을 지켜보았다. 15초쯤 있었을까. 할딱거리던 꿩이 고개를 툭 떨어뜨리더니 사르르 눈을 감았다. 나는 잠시 후 엎드린 자세에서 일어나 꿩을 집어 들었다. 멧돼지를 죽일 수 있는 굵은 납탄이 꿩의 하복부를 긁으면서 지나갔으니 밸(腸)의 대부분과 아랫배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대대장님, 꿩을 잡으셨습니까?”

    경비병중 선임자가 달려왔다. 꿩을 잡았으면 자신이 들고 다니려고 온 것이다. 나는 그 꿩을 땅에 파묻고 싶었다. 그러나 대대장이 사병 앞에서 별난 행동을 하면, 전쟁터에서 지휘통솔에 지장이 있을 수 있다. 경비병 선입자에게 꿩을 들려 솔밭 속에서 나온 나는, 덤불 있는 곳으로 내려와서 수행경비병을 모두 모이게 했다. 아직 해가 남아있으니 몇 마리 더 잡아 553고지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경비병에게 “한 마리라도 잡았으니 됐다. 돌아가서 할 일이 있다”면서 경비병들을 인솔하고 너구리굴 같이 어두컴컴한 호속으로 돌아와 연대본부와 군용 EE8 전화기로 통화를 했다.

    엽총으로 잡은 꿩은 제32연대장 김용순(金容珣) 대령의 몫이 되었다. 나는 그 후로는 꿩 고기에 입을 대지 않았다.

     

  • ▲ 꿩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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