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동구나 몽골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자비한 총칼과 거짓 선전선동으로 북한에 공산당 일당 독재를 강제한 것과는 달리, 미국의 푸른 군대는 1948년 자유민주가 뭔지 공산주의가 뭔지 모르는 한국에 자유민주적 선거를 도입했다. 미군은 패전국인 일본과 서독에도 자유민주를 도입했다. 링컨의 미국은 패전국이었든 패전국의 식민지였든 국민의 수준과는 무관하게 새 국가 새 국민에게 자유민주 체제라는 자결권을 주었다. 여성의 참정권으로 형식적 자유민주가 완결되는 데는 길게는 300년 짧게는 200년 걸리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미국은 서독과 일본과 한국에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돈벼락을 내리듯 동시에 선물했다.  

     서독과 일본은 후발 산업국으로서 국민의 의식과 수준은 그때까지 스스로 자유민주를 성취할 단계가 아니었지만, 미국이 군국주의를 해체하고 막상 자유민주를 선물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거의 서구 수준의 자유민주를 꽃피웠다. 군국주의의 악몽에서 벗어나자, 교육 수준과 과학기술 수준이 서구와 대등하거나 오히려 높았던 서독과 일본은 어렵지 않게 자유민주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교육이나 경제의 밑바탕으로 보면 100년 내지 150년의 자유민주적 경험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일본에서 공산주의를 폭력으로 실현하려고 덤볐던 적군파가 찻잔 속 태풍을 일으키고 사라진 것이나 서독에서 동독을 노골적으로 추종하던 자들이 공산당을 결성했다가 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체된 것은 두 나라에서 자유민주가 정착하는 데 분수령이 되었다. 서독의 헌법재판소는 1951년부터 1986년까지 4만 건을 접수하여 370건의 위헌 사항을 가려냈는데, 그것은 우익에도 좌익에도 치우치지 않은 공정한 비정치적 판결이었다. 그래서 과격 우익정당인 사회주의제국당(SRP)도 독일공산당(KPD)도 해체되었던 것이다. 자유는 보장하되 자유를 파괴할 자유는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은 그들과 전혀 역사적 경험이 달라서 자유민주적 토대가 거의 갖춰지지 않았다. 동남아나 아프리카 신생독립국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국은 시장경제만이 아니라 자유민주도 형식상으로는 빠르게 소화되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때도 당시 국민의 교육 수준이나 경제수준에 비추면 놀랄 정도의 자유민주가 보장되었다. 정부 수립 3년 만에 작은 세계대전을 겪은 나라로서, 군사혁명이 일어난 나라로서 야당 국회의원이 늘 여당 국회의원과 숫자가 비슷했던 것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아 거의 기적적인 일이다.  

     한국에선 사회가 성숙한 만큼 지난 20여 년간 군사 쿠데타를 걱정하는 것은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교육이나 경제나 과학기술과는 달리, 사상이나 정치의식은 자유민주를 정착하기에는 한참 멀었다. 막상 선거가 지방자치까지 허용되자, 자유를 파괴할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까지 선거에 입후보하고 당선된다. 일본의 적군파에 해당하는 386운동권이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적도 있고 여전히 그들이 기세를 떨친다. 서독의 공산당에 해당하는 민노당도 기세등당하다. 대문에 어엿하게 김정일 장군을 찬양하는 글을 달아놓는다. 기껏해야 벌금 조금 물면 그만이다. 헌법재판소는 막가파 방송과 깽판 시위대의 협박에 못 이겨 결정적 순간에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 국회의원 3분의 2가 찬성표를 던진 사항도 뒤집고, 수도이전은 안 되지만 수도분할은 된다고 죽도 밥도 아닌 결정을 내린다.  

     더욱 가관인 것은! 대통령이든 시장이든 도지사든 교육감이든 선거에 당선되면 제 멋대로다. 헌법도 없고 법률도 없다. 마음대로 뒤집는다. 헌법수호의 엄숙한 선서(헌법 제69조)는 그 시간으로 잊어버린다. 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헌법 제87조)을 꿈에라도 생각하는 대통령은 한 명도 없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헌법 제4조)을 생각하는 대통령도 한 명도 없다. 사법부를 닭 쫓던 개 신세로 만드는 사면권은 왕조시대 왕보다 더 남용한다.  

     가신(家臣) 무리들에 둘러싸여 자유민주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거민주로 한정하고, 선거당선을 적군(敵軍)에 대한 아군(我軍)의 승리로 확신하여 정치학살과 경제약탈을 자행할 수 있는 독재위임권으로 받아들인다. 숫제 점령군이다. 어느 날 갑자기 300만의 같은 민족을 굶겨 죽인 자가 자주평화통일의 민족 동반자로 부상하고, 어느 날 갑자기 경찰을 죽인 자가 민주인사로 둔갑하고, 어느 날 갑자기 주식을 10조 원어치 가진 부자는 보유세가 한 푼도 없지만 소득 한 푼 없이 빚이 절반인 10억 원 아파트 가진 거지 중산층은 수백만 원의 보유세를 내야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신용을 잘 지킨 5등급은 25%의 이자를 내고 신용을 안 지킨 6등급은 13%의 이자를 내고, 어느 날 갑자기 평등은 없고 획일만 있는 평준화를 일부 보완하는 사립자율고는 지분이 한 푼도 없는 선거 교육감에 의해 허가가 취소된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현주소다. 법치 수준이 엉망인 민주의 허망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