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외교관 납치공작을 펼친 북한정보공작원들의 정체

    그렇다면 홀연히 나타나서 나를 납치해 가려다가 나의 망명서를 받아내지 못하고 사라진 북한정보공작원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 었을까?

    이에대해 북한노동당 3호청사 높은 간부로 있다가 1980년대에 대한민국으로 극비리에 귀순해 온, 이 문제를 담당했던 황일호 씨가 증언함으로써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1978년 9월에 나를 신문하기 위해 호치민에 파견된 자는 북한노동당 3호청사 통일전선부에 속해 있는 중견 간부 궁상현, 박영수, 한경수의 세 명이었다. 선임자인 궁상현의 경력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탄광 노동자 출신이며, 8·15 후 일찍 노동당에 입당하여 중앙당 학교를 마치고 당 간부가 되었다. 6·25 때는 군에서 사단선동원을 지냈고, 제대 후 다시 3년 과정의 중앙당 학교를 나와 연락부의 지도원이 되었다. 1980년대 남북적십자회담에도 모습을 보인 노동당 3호 청사요원이기도 했다. 나를 신문한 또 한명의 요원은 박영수 였으며, 역시 3호청사의 빼어난 간부 일꾼이었다.

    황일호 씨의 증언에 의하면 내가 북한에 올 경우를 대비하여 3호청사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내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묵을 초대소며 기자간담회 준비와 대남정치공세 계획서까지 짜두었고, 우리 누님들에게는 현재 살고 있는데서 좋은 곳으로 옮길 계획과 대면준비까지 시나리오를 마련했다고 했다. 그무렵 3호청사는 이런 일들로 한때 부산을 떨었다고 한다.

    그들의 활동 목표는 나를 굴복시켜 자술서를 쓰게 하고, 북한으로 망명하겠다는 자의(自意) 망명성명서를 쓰게하여 평양으로 합법적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첫째 목표였다. 외교관 면책특권을 규정한 비엔나협정도 자의에 의한 타국으로의 망명은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양으로 데려가는 문제가 어려워지면, 나를 사상전향시켜 북한의 비밀첩자로 만들어 서울로 돌려보내는 것이 또 하나의 목표였다. 이럴 경우에도 그냥 석방하는 것이 아니라, 석방의 대가로서 남한에서 복역 중인 남파간첩들과 교환한다는 계획을 그들은 세워놓고 있었다.

    ◇ 옥중에서 처음 받은 본국의 훈령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전력을 기울여 석방 외교 노력을 하라고 김동조 외무부장관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지시했다. 이에따라 주 유엔 박동진 대사, 주 프랑스 윤석헌 대사, 주 스웨덴 윤하정 대사, 주 벨기에 송인상 대사, 주 덴마크 장지량 대사, 주 인도 이범석 대사, 주 태국 박근 대사 등이 두드러지게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놀랍게도 1978년 11월 2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우리 외무부 장관 훈령이 나에게 하달되었다. 옥중에서 처음 받는 본국 훈령이었다.

    1. 현재 한국대표단, 월공대표단, 북괴대표단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이 공사, 서 영사, 안 영사의 석방을 위해 3자회담을 하고 있음.
    2. 억류되어 있는 한국외교관 세 명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임.
    3. 북괴요원들의 어떠한 협박 공갈에도 겁내지 말고 북한에 가겠다고 동의하지 말 것.

    3자회담의 장소·개시일자·대표단 명단 등은 훈령에 일체 명시되어 있지 않아 궁금하기는 했으나, 이러한 회담은 국제기구나 제3국의 중재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우리 세 명의 한국외교관 문제가 국제적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으니, 북괴가 우리들을 강제로 납치한다는 것은 더욱 힘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걱정은 여전히 있었다. 그것은 과거의 예로보아 북괴나 베트남 공산정권이 다같이 독선적이고 후진적이며, 공연히 트집을 잡아 회담을 질질 끌기도 하고 깨기도 하는 곤란한 상대들이라는 점이었다.

    ◇ 뉴델리 3자회담... 北 '억지주장', 한국외교관 1명 당 남파간첩 150명 교환?

    뉴델리 3자회담 그런데 외무부장관 훈령에 적혀있는 3자회담이란 대체 어떠한 것이었을까? 먼 훗날에 알게 된 일이지만, 1978년 7월 24일부터 인도 뉴델리에 있는 주인도 베트남 대사관이 소유하고 있는 부속건물인 허름한 독립가옥에서, 한국·북한·베트남의 3개국 외교대표단들이 모여 호치민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한국외교관들의 석방문제에 대해 비밀회담을 가졌다. 한국측 대표는 외무부차관에서 스웨덴대사로 발령이 난 윤하정 대사를 수석대표로 하고, 하태준 중앙정보부 국제담당차관보, 공로명 외무부 아주국장, 송한호 중앙정보부 이사관 등이 대표 단원들이었다. 두 차례의 회의가 있은 다음 한국측 수석대표는 이범석 주 인도대사로 교체 되었으며, 하유식 외무부 심의관이 새로 대표단에 합류했고, 장재룡 외무부 이주총괄과장이 회담 행정을 담당했다.

    북한 측 대표단은 조명일이 수석대표였다. 조명일은 당시 대남비서 김중린 밑에서 사실상 남북대화를 총괄해온 통일전선부 부부장이었다. 대표로는 노동당 3호청사 통일전선부의 박영수, 김완수 등이었다. 그들은 나를 압박하여 북한으로 가겠다는 자의망명서를 받아내는 것과 그대로 석방하여 서울로 보내는 양면 시나리오까지 가지고 있었으나, 석방할 때 남한에서 복역중인 남파간첩과 한국외교관의 교환비율은 뉴델리 3차회담의 진전을 봐가며 조절하기로 정하고 있었다.

    평양을 출발하기 전에 대남비서 김중린은 이들 대표단을 데리고 당 중앙이며 조직비서인 김정일의 지시를 받기 위해 찾아갔다. 황일호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김정일이 “남조선에 갇혀있는 남조선 혁명가(남파간첩)가 현재 얼마나 되느냐?”고 김중린에게 물었다.“ 400명 가량 될 겁니다만….”김중린이 대답하자, 김정일이 대뜸 “으음…. 그러면 1명 당 150명으로 바꾸자고 그래…”라고 명령했다.

    나를 평양으로 데리고 가더라도 나머지 한국외교관 두 명에 대한 교환비율이 될 수 있고, 또 나를 서울로 보낼 때에는 한국외교관 세 명에 대한 교환비율이 될 수 있는 수치는 이렇게 김정일의 말 한마디에 따라 결정 된 셈이다. 너무도 엄청난 편차가 있는 교환비율에 김중린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김정일은 한마디 덧붙였다.

    “왜 그러는가? 많아서 그런가? 회담에 임할 사람들이 그렇게 졸장부여서야 되겠느냐. 회담이든 뭐든 처음부터 판을 크게 치고 내밀어야지… 그러면 얼마로 하려 했는가?” 김정일의 말은 절대로 오류가 없는 신(神)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김중린 이하 모두가 묵묵부답 이었다.

    뉴델리 3자회담이 시작되자 우리측은 국제법의 절대보호를 받는 외교관을 간첩과 교환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며, 북한측은 무슨 근거로 그런 발언을 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북한측은 콜롬비아·볼리비아·페루 등 중남미 테러국가들의 도시 게릴라들이 자국 내에 있는 미국대사관을 습격 점령하고, 미국외교관들을 인질로 억류하고 수감중인 도시게릴라들과 맞바꾸고 있는 예를 들었다. 국제법상 말도 안되는 유치한 생떼지만 우리 측으로서도 웃어 넘길 수 만은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위시한 외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 등 한국정부 수뇌부 모두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베트남에서 외교관을 구출하라”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측에는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가 하나있었다. 그것은 남한 전체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남파간첩수가 450명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이었다. 뉴델리 3자회담 제 2차 회담에서 우리 측은 “교환하자는 제의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수가 부족하므로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 측은 계속 150명을 주장했고, 우리측은 “그만한 수가 정말로 없다”며 옥신각신 회담은 지루하게 진전없이 진행되었다.

    어느날 북한측이 우리측에 “그러면 남조선 내의 형무소에 수감된 남조선 혁명가(남파 간첩)들의 명단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 측이 체포 수감된 남파간첩의 명단 일부를 내놓았다. 그러자 북한 측은 명단을 내팽개치며 “이들은 우리가 보낸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간첩을 보낸 일이 없다. 조작이다!”라며 딱 잡아떼고 나섰다. 그리고는 “정 그렇다면 우리가 명단을 제시하겠다!”면서 400여명이 되는 명단을 우리 측에 들이밀었다. 그 명단 중에는 통일혁명당과 민족해방전선 사람들이 들어 있었고, 더러는 이미 사망한 이들과 전향해서 새 삶을 살고 있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어떤 명단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뉴델리 3자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대표단은 계속해서 평양으로 암호 전문을 보냈다. 황일호 씨의 증언에 따르면 이 암호전문은 김정일에게 일일이 보고되었고, 김정일은 그것을 바탕으로 그때그때 지시를 보내왔다. 즉, 김정일이 직접 뉴델리 3자회담 북한측 대표단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 공산군 대병력은 캄보디아에 침공하여 1979년 1월 9일에는 프놈펜을 점령하고 캄보디아를 정복했다. 프놈펜이 함락되고 3일 후인 1월 12일, 북한은 <노동신문> 논설을 통해 베트남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당장 침략 행위를 중지하고 물러가라고 촉구했다. 2월 17일 중공이 베트남 국경을 침공하자 북한 측은 중공 측을 지지했다. 이러자 정세 변화 때문에 1979년에 들어서도 뉴델리 3자회담은 두 세 차례 열렸으나, 서로가 어색해 흐지부지 결과없이 헤어지곤 하였다.

    ◇ 아이젠버그와의 협상

    거상 아이젠버그와의 접촉이 무렵 어느 날, 유태계 미국인 아이젠버그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접근해 왔다. 아이젠버그는 196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에 외국 차관을 알선해 주는 대가로 엄청난 알선료를 받아 부를 축적한 거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말년에 아이젠버그를 기피했으며, 이 거상은 한국을 떠나야 할 처지에 놓였다.

    아이젠버그는 자유국과 공산국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도지사를 두고 있었으며, 베트남에 대한 외국의 경제원조도 알선해 주면서 베트남 정부 고위인사들과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이젠버그 회장은 김재규 부장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내가 베트남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이 공사를 위시한 세 명의 한국외교관을 살려서 서울로 데려올 수 있다. 이 일을 성사시키면 한국에서 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나에게 훈장을 수여해 줄 수 있겠는가?”
    귀가 번쩍 뜨인 김재규 부장은 그 길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달려가서 이를 보고했다. 고민에 빠져있던 박 대통령은 즉각 이를 승인했다. 극비에 붙여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한국측에서는 박 대통령과 김 부장 이외에 영어에 능통한 중앙정보부 비서실장 김갑수 준장과 국제정보국 이종찬과 장만이 이 일에 종사하기로 했다.

    박 대통령은 외무부장관과 중앙정보부장에게 지시하여, 성과도 없이 지지부진 시간만 무한정 끌고 있는 뉴델리 3자회담에서 우리 대표단을 1979년 5월 23일 철수시켰다. 박 대통령은 아이젠버그를 통해 이미 베트남의 입장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박 대통령에게 “북조선의 주장은 우리 베트남이 듣기에도 억지다. 3자회담을 끝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머지 않아 외교관 석방이 실현되려고 할 즈음, 박 대통령은 돌연히 세상을 떠나시고 김재규 부장은 형무소에 수감되고 김갑수 준장도 체포 수감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 바람에 외교관 석방 비밀교섭은 당분간 공중에 뜨고 말았다. 그로부터 한달 반 후, 유일하게 무사히 남아있는 이종찬 과장이 전두환 합수본부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고, 전 본부장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최 대통령은 신현확 국무총리와 박동진 외무부장관에게까지 알리고, 아이젠버그 회장을 접촉케 했다.

    1980년 2월 27일, 나는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모 비밀연락망을 통해 어렵게 보내온, 최규하 대통령의 구술사항을 박동진 외무부장관이 받아서 작성한 다음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1. 이 공사가 79년 12월 11일 최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을 잘 받았음.
    2. 하기 사항은 높으신 웃어른(최 대통령을 가리킴)이 말씀하시는 것을 전하는 것임.
    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확고한 국가관을 가지고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절개를 지키는 이 공사에게 찬사를 보낸다.
    나; 고 박 대통령 생존 시에 우리 정부는 각종 외교채널을 통하여 억류 외교관 석방을 위해 전력을 다했으며, 현재도 그렇게 하고 있다.
    다; 월남 정부는 작년 말에 억류된 한국 외교관들을 석방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 석방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 우리 정부는 억류된 외교관 석방을 위하여 계속 노력할 것이니 석방의 그날까지 건강에 유의해주기 바란다.

    편지를 읽고 나니 석방의 전망은 아주 밝아보였다. 그러나 4년 반 동안 공산측에 하도 속아왔던 터라, 혹시라도 돌발적으로 불리한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의구심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약 1년 반 전부터 말썽을 부리던 치통은 최근들어 아주 격렬한 통증을 수반하며 반복되었다. 흔들리는 이도 있고, 잇몸에서는 피고름이 자주 나왔다. 나로서는 큰 고통이었으며, 손톱과 발톱도 썩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기다리고 기다리던 석방의 날은 드디어 왔다.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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