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투옥 297일만에 처음으로 허용된 15분간의 일광욕

    정치범에 대한 치화형무소의 급식은 하루 두끼, 아침과 저녁 식사 뿐이며 점심은 굶겼다.  한끼의 식사는 통상 아주 작은 월남 밥공기 하나 반 정도의 묵은 쌀밥, 그리고 반찬은 대개  늙은 호박소금국 또는 배추소금국 반공기가 전부였다.

    돼지고깃국은 한달에 한번 나왔으며,  밤톨만한 돼지고기 두점이 들어 있었다. 밥의 양도 문제였지만, 부식의 양이 너무 적어서 이런 주·부식으로는 매끼 내 위장을 3분의 1밖에 채울수 없었다. 그런데다가 점심은 굶기니 허기져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평소 76에서 78킬로그램을 유지하던 체중이 46킬로그램까지  내려갔다. 안닝노이찡의 지시에 의해서 나에게는 일광욕이 금지되었다.

    투옥 6개월을 맞는 1976년 4월 초부터는 햇빛을 단 5초간이라도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간절함에 미칠것 같이 햇빛이 그리웠다.

    여러가지 병이 생겼다. 각기병이 생기고, 오른쪽 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자주 현기증이 나고, 앉았다가 일어설 때 빈번히 앞이 캄캄해지며 눈 앞에 수많은 별들이 명멸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마의 피부가 자꾸만 머리쪽으로 잡아당겨지는것 같은 이상한 증상이 일어나고, 혈관속으로는 작은 개미가 기어다니는 듯한 증상이 하루에도 여러번 생겨났다. 종아리에는 시퍼렇게 굵은 정맥들이 툭툭 튀어나와 보기에 흉했다. 그리고 극심한 변비로 인해 곤욕을 치렀다.

    내 고집을 꺾지 못한 안닝노이찡이 나에게 일광욕을 처음 시켜준 것은 투옥된지 297일이 지난 1976년 7월 27일이었다. 일광욕 허용시간은 15분간 이었다. 그 보름후인 1976년 8월 11일에 또 일광욕이 있었고, 8월 25일에도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그렇지만 9월에는 한번도 시켜주지 않더니 10월에는 초하룻날과 11일에 시켜주었다.

    ◆ 비밀쪽지의 정체는... 

    이런가운데 10월 13일의 아침이 왔다. 독방에서 외로이 지내는 내 감방철문이 찌그득 찌그득 들쿵하는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간수가 나에게 물을 길어오라고 했다. 복도를 지나 물탱크방에 가서 물을 길어 독에 붓고 있는데 누군가 감방안으로 들어와 두리번 거리며 무엇을 조사하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나를 꾹 찌르고 긴장한 눈초리로, 자기는 내편이니 그리 알고 비밀유지에 각별히 조심하라는 제스처로 손가락으로 입을 가로막았다. 그러면서 오른손으로 작은 종이쪽지 똘똘 말은것을 내 왼쪽 반바지 호주머니 속에 넣어주고 쏜살같이 감방을 나가버렸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몰래 찍어준 사진 ⓒ 뉴데일리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몰래 찍어준 사진 ⓒ 뉴데일리

    물 긷기가 끝나고 감방 문이 잠기기를 기다려 나는 쪽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사이공에 남아 있는 이순흥 교민회장의 편지였다. 편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나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1년간 애를 써오다가 이제야 겨우 이 편지를 보내니 건강상태, 북한 3호청사 요원으로부터 신문을 받았는지의 여부, 그리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회신해 주기 바란다, 서울에 있는 내 절친한 친구인 이재순 육사동기의 소식, 특히 보안에 유의하여 회신편지는 순 한글로만 쓸 것과, 이 편지를 배달하는 간수들이 비밀이 탄로날까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래서 회신은 이회장의 편지 여백부분에 써서 편지가 속히 되돌아와서 소각해 버리는 것을 그들이 확인하려 하므로 그렇게 해 달라, 이규수 참사관 이하 다섯 명의 한국 외교관은 1976년 5월 초에 귀국했다는 사실 등등이 적혀 있었다.

    이순흥 회장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지만 나는 이 회장의 필체를 잘 모르고 있었다. 이것이 과연 이 회장이 쓴 편지일까? 이것을 이 회장이 쓰지 않았다면 누가 썼을까? 아니면 광대뼈의 한국어 통역관인 튀기가 쓴 것일까? 북한 제3호청사 일꾼들과 베트남 안닝노이찡 경찰들이 앞으로 있을 신문에서 나를 굴복시키기 위한 공갈, 협박, 회유의 참고자료로 악화된 내 건강 상태와 심경변화를 타진해 보기 위한 얕은꾀로 조작해낸 것은 아닐까?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이 회장이 개척해 놓은 비밀 연락망이 틀림 없고, 이 편지가 이 회장이 쓴 것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제2신, 제3신이 계속해서 올 것이다. 모든것이 확실하게 확인될 때 까지는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나는 이번 회신에는 북한노동당 3호청사 일꾼들이나, 베트남 안닝노이찡 경찰이 보아도 무방하고 이 회장이 받아도 좋은 중립적 내용, 그러나 나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을 쓰기로 했다. 시에스터 시간이 되자 거적때기 위에 엎드려서 편지의 여백 부분에 회신을 썼다.

    회신 내용은 필요한 일용품, 여러 가지 의약품, 음식물들을 차입해줄 것과 정식으로 면회를 한번 와달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는 그날 오후, 감방 철문에 붙어있는 손바닥 크기의 쪽문을 열고 손을 불쑥 내미는 연락원에게 얼른 주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나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쓰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프랑스 주재 윤석헌 대사는 F국 정부의 도움을 얻어 상당한 외화를 주사이공 F국 영사관으로 보냈다. F국 영사관측은 이 돈을 이순흥 교민회장에게 전달, 1년간의 노력끝에 이러한 연락망이 가동된 것이다.

    10월 16일 오전 9시경, 이순흥 회장의 제2신이 연락원의 손을 거쳐 나에게 전달됐다. 전번의 편지에도 그런 특색이 나타나 있었지만, 이번 장문의 편지에는 더욱 뚜렷이 이 회장의 특징적 성격이 나타나 있어 나는 이 편지가 이 회장이 쓴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편지 문장이 “없음” “보내겠음”등으로 끝나다가 갑자기“반갑습니다”로 변했다가 다시“궁금함“ 이런식으로 변하고,“ ......”등을 즐겨 썼으며,“ 금년 내로 석방이 절대 가능하오니”등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단정적 표현 등은 이 회장의 독특한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 1977년 7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

  • ▲ 박정희 대통령 ⓒ 자료사진
    ▲ 박정희 대통령 ⓒ 자료사진

    나는 제2신에 대한 회신을 보냈다. 10월 22일 아침 9시경에는 이 회장의 제3신이 왔다. 나는 이회장의 권유에 의해서 지난 1년간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을 종합 보고하는 장문의 보고서를 편지에 담아, 우리 외무부 장관 앞으로 그날 오후 늦게 연락원을 통하여 보냈다.

    훗날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보고서는 주호치민(사이공) F국 영사관을 거쳐, F국 외무부에 전달되었다. F국 외무부는 윤석헌 대사에게 전달하고, 윤대사가 외무부 장관에게 보고함으로써 1년 간의 내 행적을 우리 정부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10월 30일에는 역시 이 회장의 권유편지에 의하여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옥중 비밀편지 제1신을 써서 비밀 연락원에게 주었다.

    이 비밀연락원을 통해서 의약품과 식품들도 간간히 이 회장이 보내왔다. 그러나 발각되면 큰일이었다. 나는 편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식은땀을 흘렸다. 다른 감방으로 이감되어 가면 몇달씩 연락망이 재구성 될 때까지 끊어지는 일이 종종 생겨 애를 태우기도 했다.

    1977년 7월 15일,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첫 편지를 써 보냈다. 이 편지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구출하는데 가일층 힘을 쓰라고 각료들에게 강조했다고 한다.

     

  • ▲ 박정희 대통령 ⓒ 자료사진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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