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련군 꺼삐딴(대위) 김일성은 소련군 총사령관 스탈린으로부터 독재의 핵심을 전수 받았다.
    그것은 조직 폭력단의 영구불변 수법으로 일단 만만한 놈을 기습적으로 때려눕힌 다음 느긋하게 더 센 놈과 협상하는 것이다. 협상에서 잃을 것은 전혀 없다. 협상은 새로 강탈한 장물을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문전옥답과 똑같은 기득권으로 대외적으로 협박승인 받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협상에 임할 때는 대놓고 허리에 불룩 권총을 차고 나가, 깡패가 억지 말에 앞서 손마디를 우두둑 꺾듯이 연신 권총의 입술을 쪽쪽 애무하거나 권총의 방아쇠를 달그락거린다. 수틀리면 곧장 협상장에서 뛰쳐나가 더 큰 도발을 선물하겠다는 수작이다. 스탈린은 그런 우격다짐으로 동유럽과 몽골과 북한을 얼렁뚱땅 공산 식민지화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으로부터 새 하늘이 열리는 감동을 받고 새 땅이 솟아오르는 영감을 얻었다.
    밥풀 3개 대위에서 하루아침에 별 5개 원수로 발탁된 김일성은 기고만장 용기백배 5년 만에 스탈린의 방법을 크게 써 먹었다. 그렇게 하여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간, 서기 676년 삼국통일 후 장장 1274년 만에 한민족은 전면적인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고려왕조와 조선왕조가 들어서던 때도 전면적인 내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두 번 다 지극히 평화로운 왕조 교체였다. 가끔 외적의 침략은 받았지만, 동족끼리 전면전을 벌인 적은 1300여 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세계 유일의 민족이 한민족이다. 그래서 백의민족이다. 

     김일성은 6.25 후에도 선 도발 후 협상 또는 선 도발 후 발뺌 작전을 애용했다.
    용산 전쟁기념관의 기록에 따르면, 월남전에서 국군은 4770명이 전사했고, 1953년 휴전 이후 북한의 도발로 4712명이 희생되었다. 여기에 천안함 희생자 46명을 더하면 4758명이 된다. 12명만 더하면 월남전 희생자와 같아진다. 이승복 어린이와 858 대한항공기의 희생자 115명 등 민간인을 합하면, 이미 월남전 희생자를 넘어선 지 한참 지났다. 

     김일성 2세도 선 도발 후 협상 깡패전략을 금과옥조로 삼는다. 이를 선군정치라 이른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이라는 태산북두가 있었고, 김정일에겐 중공이라는 붉은 하늘이 있다. 김일성이 후궁을 끼고 잠자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하게 만들었던 박정희와 그 후계자들이 사라진 후, 한국은 아예 김정일 눈에는 비곗덩어리 뺑덕 어미로도 안 보인다. 변학도에게 토호들이 보낸 긴 선물단자(單子)를 들고 머리를 조아리는 이방으로밖에 안 보인다. 핵무기같이 좀 버거운 문제를 일단 터뜨린 후, 부들부들 떠는 한국은 숫제 거들떠보지도 않고 태평양 건너로 망원경을 슬슬 돌린다. 슬쩍 뒤돌아보면 아니나 다를까 어제는 강택민, 오늘은 호금도가 헛기침하며 뒷짐 지고 서 있다. 내일은 첫 태자당 출신 습근평(習近平)이 눈을 껌벅껌벅할 것이다. 참고로, 습근평의 아버지 습중훈(習仲勳)은 모택동과 등소평의 동지였다. 

     김정일은 선전선동에도 능하다. 이것도 스탈린과 김일성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거짓말도 100번하면 바보들에게 진실로 각인된다는 것이 공산주의 선전선동의 핵심이다.
    김정일이 거짓말을 거짓말로 인정한 경우는 딱 한 번밖에 없다. 일본과의 수교로 유럽 은행 곳곳에 예치한 비자금의 두 배 가량 단숨에 벌어볼까, 하고 일본인을 납치 안 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다. 웬걸, 상상으로 김칫국만 들이켰다. 조총련의 알토란 돈줄마저 막혀 버렸다. 불같이 화를 내며 동해안에서 일본을 향해 여러 번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사실상 세계 2위 군사대국 일본은 놀라는 척하며 득달같이 UN으로 달려갔다. 

     김정일이 헛기침으로 조종하는 ‘평화니, 민족이니, 친일파척결이니, 정통성이니, 남조선의 군부독재니’ 선전선동에 ‘황공무지로소이다!’ 감동하는 무리들이 한국의 방방곡곡(坊坊曲曲)에서 국가보안법을 시대착오적인 악법으로 무력화시키고 있다. 변학도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이방이요 호방이요 예방이다. 이들이 어느새 한국의 여론 주도층으로 떠올랐다. 멀리 미국과 유럽에도 이런 자들이 시대의 양심으로 떠오른다. 다름 아닌 자국의 국민을 3000만 명이나 학살한 모택동을 찬양하던 사르트르 같은 인간이다. 미국에서 교수다, 목사다, 하면 한국에선 그 자체로 권위를 떨쳐, 그들이 앵무새 부리를 벌리면(twittering), 한국에선 즉시 수백만 명이 실시간으로 졸졸 따른다(following). IT 왕국답게! 대략 인구의 30%이다. 

     정통우파의 푸른 숲에 둥지만 비비적 튼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이 도발하면 일단 부정하고 협상도 시작하기 전에 긴 선물단자(비핵개방 3000)를 푸른 한반도기에 매달아 흔든다.
    금강산에서 주부 관광객이 표적 사살되어도, 임진강에서 가족 단위 오순도순 야영객이 마른 날의 물벼락으로 익사해도, 개성공단에서 근로자가 인질로 잡혀도, 북방한계선 바로 아래 3차 서해 교전장 바로 옆에서 천 배 백 배로 보복 아닌 보복을 당해도, G20에 즈음하여 제2의 6.15를 선언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신문에 날 때까지 숨기거나, 철없는 야영을 탓하거나, 벙어리 5년 귀머거리 5년(한국은 대통령 임기가 5년)을 당부하거나, 북측에 특이동향이 없다고 독점적으로 예단한다.
    그러다가 여론이 악화되면 그제야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뜬다. 한 번만 더 그러면 하늘에 맹세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봉숭아학당 으름장을 놓는다. 결과는 역시! 바람이 안 불어 풍선 한 개 못 날리고 국방예산이 부족해 확성기 한 번 틀지 못한다. 그저 미국만 흘낏거린다. 그 뒤에 숨어서 이따금 고개를 내밀고 김정일의 거동을 살핀다. 

     박정희는 김일성이 도발하면 협상 전에 바로 응징했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다.”
    후속 조치도 열 배 스무 배로 강화했다. 예비군 창설과 군현대화는 그렇게 이뤄졌다.
    용공세력은 독재의 소리를 들을지언정 뿌리를 뽑았다.
    김대중과 김영삼도 박정희 생시에는 반공의 일렬종대에서 2위로 뒤처지거나 한 치라도 벗어날까 안절하고 부절했다.  “나는 절대 빨갱이가 아닙니다!”

    김일성의 무한공포 공산독재에 맞서 위풍당당 자유민주를 지킨 지도자는 박정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