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아마르나

글-사진 이태원 | 최종편집 2010.06.28 16:11:38

실패한 일신교로의 개혁 - 성공한 아마르나 문화 혁명

카이로에서 남으로 300㎞, 엘-아슈무네인에서 남으로 조금 떨어진 나일 강 동안에 자리한
텔 엘-아마르나Tell el-Amarna , 이곳은 3천 5백여 년 전에 다신교를 일신교로 바꾼 종교개혁의
무대였다. 아마르나의 옛 이름은 「아텐의 지평선」을 뜻하는 아
케트아텐Akhetaten으로 신왕국 제18왕조 아멘호테프 4세가
미개척지에 태양신 아텐Aten을 유일신으로 모시기 위해 세운 새 왕도였다.

신왕국시대에 아멘 신관들의 권한이 너무 커져 파라오가 되기 위해서는 신관들의 지지를 얻어야 할 정도로 왕권을 압박했다. 이에 아멘호테프 4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아멘 신관들의 존립기반이었던 국가최고신 아멘을 비롯하여 몇 천 년 동안 섬겨온 고대 이집트의 모든 신들의 신앙을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대신에 그는 「신은 태양신 아텐 뿐이다」라고 선언하고 아텐 만을 신앙하도록 했다.


▲ 유일신 아텐을 찬양하는 아크엔아텐 (이집트 박물관) 



인류 최초의 종교개혁, 신들을 추방하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최초의 종교개혁이며 다신교를 일신교로 바꾼 「아마르나 종교 혁명」이다.
모든 신전이 폐쇄되었고 신관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신전 기둥이나 기념건축물에서 아멘의 이름을 모두 삭제해버렸다.
파라오가 직접 제사장을 겸했다.

태양신 아텐은 원래 태양신 라-호르아크티32)Ra-Horakhty의 일부였으나 독립하면서 그 지위가 향상되어 태양신과 동등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의 신들은 전통적으로 사람의 몸에 동물의 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의인화擬人化해서 표현되었다. 그런데 아텐은 태양원반에서 태양의 빛이 지상으로 내려 비치는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숭배의 대상이 빛을 내보내는 태양원반 그 자체였다.
아텐 만은 다른 신들처럼 의인화 하지 않았다.

유일신을 위한 새 수도 건설

아멘호테프 4세는 즉위하자 바로 아텐 신을 위한 신전을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의 동문 밖을 비롯하여 멤피스, 히에라콘폴리스 등에 세웠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신관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신 아텐 만을 섬기기 위해 치세 5년째 되던 해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옮겨갔다.
이곳이 신 아멘이 지배했던 테베를 버리고 북으로 300㎞ 떨어진 나일 강 중류의 사막지대에 건설한 새로운 왕도 텔 엘-아마르나이다.
아텐 신앙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파라오의 이름도 「아텐의 빛」이라는 뜻의 아크엔아텐Akhenaten으로 바꾸었다.
새로 건설한 텔 엘-아마르나는 동서 5㎞, 남북 10㎞의 도시로 도심에 나일강과 나란히 폭 100m의 「왕도의 길」이 남북으로 뻗어있었다.
도시의 북쪽에 북의 궁전, 남쪽에 남의 궁전, 중앙에 왕궁과 아텐 신전이 있었다.

17년만에 원점으로...투탕카멘 등장

그러나 아크엔아텐이 죽자 그의 종교개혁은 17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의 뒤를 이어 파라오가 된 투탕카텐Tutankhaten은 치세 2년째 되던 해에 아텐 신앙을 폐지하고 아멘 신앙을 부활시켰다. 왕도 역시 아마르나를 버리고 멤피스로 옮겼다.
그리고 파라오의 이름도 「아텐을 위해 사는 자」라는 뜻의 투탕카텐에서 「아멘을 위해 사는 자」라는 뜻의 투탕카멘Tutankhamen으로 바꿨다.
아크엔아텐이 죽은 후 아텐 신전은 모두 파괴되었고 모든 기념물이나 기록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신전에 사용했던 돌은 람세스 2세가 뜯어다가 헤르모폴리스에 신전을 짓는데 사용했다.
텔 엘-아마르나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세기말, 영국의 고고학자인 페트리의 발굴로 오래 동안 잊혀 있었던 텔 엘-아마르나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은 황량한 평원에 폐허가 되어버린 북의 궁전과 아텐 신전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유적의 북부에 귀족들의 암굴무덤과 아크엔아텐의 무덤이 남아있다.

神들이 보시도록 그리다

아마르나 혁명Amarna Reformation은 종교개혁으로서는 완전히 실패였다.
그렇지만 예술부문에서는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수천 년 동안 전통을 매우 중요시하여 그 내용이나 모양에 있어서 거의 변화가 없는 매우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문명이었다.
해마다 나일 강이 범람하여 풍요를 안겨준 자연조건과 사면이 사막과 바다로 에워싸여 외부와 단절된 지리적 조건이 결합하여 전통성과 보수성이 매우 강한 폐쇄적인 문명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집트 여행을 해보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벽화나 돋새김의 내용이나 표현방법이 모두 유사하다.
이집트 문명에 있어서 석조건축물, 조각, 벽화, 돋새김 등은 예술작품이 아니고 모두가 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그러기 때문에 벽화나 돋새김을 사실주의나 자연주의로 묘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신이 보고 식별하기 쉽도록 입체감이나 원근을 무시한 초자연적 방법으로 표현했다.
만드는 사람의 입장보다는 이것을 보는 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이 묘사되었다.

예컨대 사람을 묘사할 때는 신이 그 사람의 특징을 가장 잘 알 수 있도록 얼굴과 발은 옆으로, 가슴과 어깨와 눈은 정면으로 그렸다. 조각도 정면으로 새겼다. 소 떼나 물고기는 그 수를 쉽게 알 수 있게 일렬로 열을 지은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수 천 년 동안 고대 이집트의 예술은 일정한 형식에 얽매어 왔다.

'아마르나 문화혁명'...원근법 작품 탄생


▲ 네페르티티의 흉상. 기원전1350년 무렵 작품. 아름다운 투탕카멘의 왕비 네페르티티의 채색흉상.(베를린 박물관) 



아마르나 시대는 이러한 전통을 깨버리고 원근법에 기초를 둔 사실적·자연주의적인 표현으로 바뀌었다. 파라오의 조각도 고귀하고 신격화된 모습보다 희로애락을 그대로 나타낸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아마르나 문화혁명」이라고 한다.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서 이 시대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아크엔아텐의 모습에서 다른 파라오처럼 이상적인 얼굴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이집트 박물관의 아크엔아텐의 조각상과 베를린 이집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의 흉상이 아마르나 미술의 대표적 작품이다.

이러한 문화혁명은 미술영역만으로 끝나지 않고 당시의 문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성서 구약의 「시편詩篇」과 자주 비교되는 「태양찬가太陽讚歌」는 새로운 형식의 문학이었다.

유일신의 원조, 유대교 성립의 뿌리

몇 천 년 동안 많은 신을 믿어온 다신교의 세계에서 일신교로 바꾸려고 했던 아크엔아텐의 종교개혁은 후에 유대교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집트학에서 고대 이집트왕조의 5대 인물로 아크엔아텐, 네페르타리, 클레오파트라, 투탕카멘, 람세스 2세를 꼽고 있다.
그 중 으뜸이 아크엔아텐이다. 그는 고대 이집트 왕조에서만이 아니라 「일신교의 원조」로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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