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상(像)을 둘러싸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여러가지 비화가 공개됐다. 1966∼1968년 장군상 건립에 참여했다가 보수를 위해 40여년 만에 다시 모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다.
    서울시는 29일 "이순신 장군 동상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가까이서 목격한 7명을 찾아 자문회의를 열어 당시 주물작업 및 기단부 시공방법 등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장군상 키 당초 계획은 5m =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동상은 흙으로 본을 만들 때까지만 해도 높이가 5m로 계획됐다.
    그러나 세종로 폭이 100m로 확장되면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동상 규모를 크게 해야 한다는 `고위층'의 지시에 따라 지금 크기인 6.5m로 변경됐다.
    당시 점토 조각은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1986년 작고) 작가의 자택 마당에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가설작업장에서 진행됐는데, 동상 크기가 1.5m 커지는 바람에 장군의 얼굴과 투구 등 상부 조각은 천정의 플라스틱을 뚫고 진행됐다고 한다.
    김 작가의 제자로 조각 작업에 참여했던 백현옥(70세)씨는 "선생은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4~5시간 쉬지 않고 점토와 석고 작업에 열중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라고 회고했다.
    ◇ 엔진, 놋그릇 녹여 청동상 주조 = 동상 주조는 성수동에 있던 대광공업사에서 진행됐다.
    대광공업사에서 주조 기술자로 일했던 김주남(65세)씨와 류용규(63세)씨는 "열악한 경제 상황에서 구리 공급이 어려워 처음에는 국방부에서 가져온 탄피를 사용하려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물이 제대로 주입되지 않아 탄피는 모두 버렸고 해체된 선박에서 나온 엔진, 놋그릇, 놋숟가락과 같은 일반 고철 등이 투입됐다.
    이마저 양이 모자라 한 번에 주물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재료가 조달되는 대로 작업을 하다 보니 동상 재질과 두께가 고르지 못했고 색상 또한 균일하지 않아 청동 고유의 색을 내지 못해 짙은 청록색의 페인트와 동분을 섞어 표면을 칠했다고 한다.
    여섯 조각으로 나뉘어 주조된 동상 몸체를 결합하는 과정에서는 동상 재료와 같은 성분의 용접봉을 만드는 기술이 없어 부산 미군부대에서 구해온 구리 용접봉이 사용됐다.
    이 때문에 동상 외부는 전체를 용접했지만 내부는 일부밖에 하지 못해 내부적으로 많은 균열이 발생했을 것으로 보이며 최근에는 `내시경' 검사까지 받아야만 했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에서 2년간의 산고 끝에 마침내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동상이 탄생했고 68년 4월 27일 광화문사거리에서 제막식이 거행됐다.
    ◇"동상 올리려 밤새 크레인 운전" = 8t 규모의 동상을 세우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이 작업에는 당시 화일전력이라는 회사에서 크레인 기사로 근무했던 이기종(72세)씨가 참여했다.
    이씨는 경기도 가평군 청평댐 인근에서 한참 작업을 하던 중 갑자기 "내일 아침 광화문사거리에서 충무공 동상을 들어올려야 하니 크레인을 긴급 출동시키라"는 연락을 받고 작업을 중단, 새벽 4시에 청평에서 크레인을 끌고 출발해 다음날 오전 10시에 광화문사거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된 크레인은 일본에서 제작된 최신 장비로, 동상을 들어 올릴 때에는 사고를 방지하고자 세종로의 모든 전차가 운행을 멈췄다고 이씨는 전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들로부터 입수한 증언과 기록물, 사진, 영상물 등 소장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이 자료를 토대로 동상을 원형대로 보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