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강기갑 의원의 국회폭력행위와 전교조 시국선언 교사, MBC PD수첩 보도에 대한 일련의 무죄판결로 많은 논란이 일었다. 이들 논란의 핵심에는 보수와 진보라는 가치관의 대립이 있다. 우리 사회는 특정 사안마다 보수냐 진보냐의 성향에 따라 찬성과 반대로 극명하게 갈린다. 하지만 정작 보수와 진보 그 자체의 진정한 의미와 구체적인 지향점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고, 무조건적인 반대와 거부로 일관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우선 ‘진정한 보수’란 무엇인가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 ▲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뉴데일리
    ▲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뉴데일리

    정치 차원에서 보수주의의 뿌리는 근대 보수주의 사상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에드먼드 버크(Burke Edmund)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비판에서 찾을 수 있다. 보수주의 사상가들의 성향은, 이성과 능력에 있어서 인간은 본원적으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한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제도의 창출이나 사회의 재구성 과정에 미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결과적으로 보수주의는 급진적인 방법, 예컨대 혁명이나 쿠데타 등에 의해 사회가 변혁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특히 버크는 개혁자가 국가의 결함을 다룰 때, 마치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하는 심정’으로, 곧 ‘경건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현대 경영학을 창시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의 저술 배경인 1930년대 유럽의 사회 변화를 특히 파시즘 전체주의의 허구성을 관찰하면서 보수주의적 신념을 갖게 되었다. 파시즘 전체주의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이성주의자들은 세상의 이치를 완벽하게 파악한 듯이 행세하며 반드시 절대주의자로 변한다. 그들은 자신이 곧 진리라고 선언하며, 이런 사고는 필연적으로 그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계몽 또는 복종시키고자 하는 의무감으로 이어지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인류의 행복에 반대하고 국가와 사회에 해를 끼치는 자로 간주된다. 이 점이 바로 파시즘 전체주의자들이 잔혹행위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관찰하면서 드러커는 역사 발전은 보수주의적 관점에 의거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드러커는 산업사회의 주역으로 떠오른 대기업에 대해 연구하면서, 기업을 비롯한 사회의 각 기관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을 책임 있게 사용하는 것이 보수주의의 요체임을 간파했다. 보수주의적 사상가들은 국가의 역할이 비대화 되지 않게 하고, 자율적인 개별 기관, 나아가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의 자율성이 커지는 사회를 지향한다. 결과적으로 보수주의 사상가들은 ‘작고 강한 정부’를 추구한다. 모든 일을 정부가 관장하려는 시도는 잘해야 낭비만을 초래할 뿐이며, 잘못된 길로 가면 전체주의적 성향을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일 드러커는 장자크 루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에 의한 구제’의 시대, 즉 국가가 모든 일을 도맡아 해결하려는 사조가 1970년대 언저리에서 종말을 고하고 이제 다원화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고 내다 봤다.
     
    드러커에 의하면 보수주의란 현상을 고수하려는 성향이 아니다. 보수주의란, 모든 역사는 연속과 변화로 이루어지며 이 둘 사이의 조화를 통해 현재를 바탕으로 부단히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고민하는 사조를 말한다. 보수주의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지금까지 걸어 온 역사와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보수주의는 모든 것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늘 재검토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변화의 방법에 있어서 만병통치식의 개혁안으로 일거에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한 번에 하나씩 손에 익은 도구로 개개의 문제를 해결해간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는 전체주의적 계획경제의 반대편, 즉 시장자본주의와 상응한다. 시장자본주의에서 국가는 기업이나 개인 등 사회의 구성 인자들이 각기 장점을 살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부여하는 체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추구하는 자유는 엄격한 책임에 의해 유지됨을 이해해야 한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스스로 이런 균형 감각을 갖고 있는지 늘 자문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사회에 급진적인 요구가 많아지는 것은 스스로 보수주의의 원칙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임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에서 이런 균형이 심하게 훼손되었을 때는 늘 전체주의라는 망령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