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대표가 다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당초 원안+α를 주장하며 반대할 때의 논리는 이른바 국민과의 약속에 대한 신뢰 문제를 내세웠다. 그러다 이번에는 수정안은 당론에 위배되는 것이고 그래서 반대라고 밝혔다.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논의에 붙이기도 전에 미리 못을 박은 셈이다.

    +α는 도대체 누가 결정한다 말인가?

    소위 당론이라는 게 과연 무엇이기에 손도 대지 말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좀 시시콜콜 따지자면 박근혜씨의 ‘원안+α’도 이른바 기존 당론에 위배되는 것이다. 기존 당론은 문자 그대로 원안이지 그에 +α를 한 것은 아니다.
    +α를 누가 결정하고 어떻게 추진한다는 것인지 따져보자. 현재로선 세종시와 관련해선 원안 외에는 아무것도 추진할 법적 근거가 없다. 수정안뿐만 아니라 이른바 +α를 하기 위해서도 우선 그를 위한 당론을 새로 정해야 하고 소위 +α를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한다. 박근혜씨가 말 한마디 툭 던졌다고 해서 그냥 되는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 원안+α론은 제기해도 되지만 수정안은 검토조차 못하겠다는 게 합당한 자세인가? 적어도 논의의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세종시 원안이 진정한 당론이기는 한가?

    더욱이 그 모든 것 이전에 그토록 완강하게 내세우는 세종시 원안이 과연 당론다운 당론이기는 한가? 당시 세종시법 표결에 참여한 한나라당 의원은 박 전 대표를 비롯해 25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표결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서도 12명이 반대했다. 120여명의 소속 의원 중 10% 남짓한 13명만이 찬성한 당론이었다.
    박세일 정책위의장이 당직과 의원직을 사퇴할 정도로 한나라당 내부의 반발이 거셌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표심을 의식해 당 지도부가 어쩔 수 없이 세종시 지지를 택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구성원의 대다수가 반대한 당론이 진정으로 일고의 재검토 여지조차 없는 신성한 당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세종시 문제는 과연 국민과의 약속인가?

    정치와 관련해 좀 한마디 한다는 사람치고 ‘국민’을 들먹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래도 국민 저래도 국민, 오른쪽으로 가도 국민 왼쪽으로 가도 국민! 박근혜씨도 세종시 원안은 국민과의 약속이라고 늘 주장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국민과의 약속인지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한 약속인지 따져보자!
    당론도 파행적으로 결정된데 이어 국회 표결에서도 한나라당 의원 대다수가 불참했다.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최소 대한민국 국민 절반 정도는 세종시 원안 추진에 반대하고 있다. 반대하는 다수 국민은 도대체 누구와 어떤 약속을 했다는 것인가? 반대하는 사람은 국민도 아니라는 것인가?
    물론 어떤 경우에도 100% 찬성이어야 국민의 뜻이라고 주장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한마디 말로 뭉뚱그리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냉정히 말해 세종시 원안은 국민과의 약속이 아니다. 그것은 솔직하게 말해 정략적 이유로 국민을 속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잘해야 충청도를 겨냥한 지역적 당근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명백한 사실에 대해 적어도 국민을 운운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결정했으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

    설사 100% 찬성으로 결정된 것이라 해도 절대로 손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고상한 태도가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신중하지 못한 경솔함이다. 이미 결정된 것이라 해도 실행에 앞서 다시 한 번 그 타당성을 숙고하는 것은 그냥 상식이다.
    어떤 선택 어떤 결정이든 완벽한 경우는 없다. 그 점에선 원안이든 수정안이든 또 다른 그 어떤 사안이든 다 마찬가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실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래서 항상 열린 자세로 끊임없이 재검토하고 반성하여 시행착오를 줄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잘잘못을 떠나 한번 결정된 것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태도다. 잘못된 결정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여 야기되는 피해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친박계의 균형발전론

    박근혜씨와 친박계 의원들은 줄곧 약속 신뢰를 말해왔다. 그런데 친박계 의원 한 명이 이번에 이전과는 다른 얘기를 들고 나왔다. 현기환 의원은 “국가 백년대계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그야말로 균형발전을 위한 부처이전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이것, 균형발전론인가? 균형발전론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열린당 그리고 민주당이 부르짖는 전매특허다. 그것을 친박계에서 들고 나온 것이다. 박근혜씨의 입장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가지로 종합해 볼 때 그 또한 균형발전론에 마찬가지의 입장인 듯하다.
    균형발전이라는 개념은 현실정치에서 반대편에 서기 힘든 참으로 사악한 선동적인 논법이다. 이것은 마치 골고루 잘사는 사회라는 말만큼이나 논박하기 힘들다. 그래서 한나라당도 공식적으로는 그 논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줄 안다. 그러나 골고루 잘사는 것을 간판으로 했던 사회주의가 공도동망으로 결론 났듯이 이른바 균형발전론도 마찬가지의 위험을 갖고 있다.
    경영학의 가장 초보적인 개념에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칙이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어떤 경우에도 원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추진할 수는 없다. 한정된 재원을 투입하여 최대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을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하여 성과를 얻고 차근히 영역을 넓혀나가야 한다. 그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지역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전략 거점에서 시작하여 성과를 거두고 그 성과를 확산시켜나가야지 전국적으로 골고루 도처에서 일을 추진해서는 그 어느 것도 성공할 수 없다.
    모두를 위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언제나 모두에 대한 피해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모두 골고루”라는 것은 당의정으로 감싼 독약에 다름 아니다.

    행정부처 이전이 발전을 가져오는가?

    수도분할의 위험성은 일단 놓아두고 행정부처 이전으로 지역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게 합당한 것인지 따져보자. 최소한 두 가지 근거, 첫째 논리적으로 합당해야 하고 둘째 역사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행정부처 몇 개의 유치가 그 지역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논리는 도시공학의 초보에도 미치지 못하는 발상이다.
    제주도에는 백화점이 없다. 제주도에는 한 해 관광객이 거의 600만 명 가량 찾는 세계적인 관광지이지만 백회점이 단 한군데도 없다. 바로 배후 인구의 부족 때문이다. 백화점은 돈이 될 만한 곳에 들어서는 것이 기본이다. 그 기준은 점포 한 곳 당 반경 3~5km 내에 적어도 60~70만의 인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정부처는 국회에서 결정하고 정부의 명령으로 이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백화점 같은 민간 상업 기업을 정부의 명령으로 유치할 수는 없다. 지금 세종시 원안으로 이전할 9부 2처 2청 공무원을 다 합쳐야 겨우 1만 남짓이다. 베드타운으로 전락하지 않고 가족이 모두 이주한다 해도 한 가족 5인을 기준으로 하면 5만이다. 이 인구로 과연 백화점은 고사하고 그 흔해빠진 대형 할인마트 하나 유치할 수 있을 것인가?
    도시의 성장과 발전에는 인구의 유입이 절대적 요건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인구 유인력은 다른 무엇보다도 기업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 상식을 외면하고 정부 부처를 쪼가리 내어 이전시켜 지역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건 순진한 발상 아니면 일종의 기만이다.

    브라질리아의 실패

    다음으로 성공적인 사례가 있는지 따져보자. 브라질의 수도는 브라질리아다. 그러나 원래 브라질의 수도는 리우데자네이루였는데 1960년 수도를 이전했다. 수도 이전의 가장 큰 동기는 말하자면 지역 균형발전이었다. 옛 수도 리우데자네이루는 대서양 연안에 치우친 항구도시다. 반면 새 수도로 선택된 곳은 브라질 넓은 땅덩어리의 중심이라 생각되는 위치였다. 브라질 건국 이래로 대서양 연안에 치우쳤던 수도를 내륙으로 옮김으로써 내륙개발을 통한 경제성장을 이루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 계획은 철저히 실패했다. 100% 계획도시로 깨끗하고 쾌적한 행정도시를 만들어 브라질의 모든 정부기관을 집중시켰지만 경제적으로는 그 어떤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 현재 브라질리아의 인구는 약 20만, 백화점 하나 입지할 경제적 자족 기능이 없는 고립된 행정 타운일 뿐이다. 브라질의 절대적인 경제 중심은 여전히 리우데자네이루이고, 2016년 브라질에서 열리는 올림픽도 브라질리아가 아니라 옛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다. 수도를 몽땅 이전해도 그런데 행정부처를 몇 개 잘라서 보낸다고 과연 그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인가?
    수도를 이전할 수도 있다. 독일의 경우처럼 통독 과정의 우여곡절 덕분에 수도가 본과 베를린으로 쪼개져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소위 균형발전, 지역발전을 이유로 수도를 움직여 성공한 사례는 없다.

    박근혜씨는 보수 세력과 정녕 등질 생각인가?

    정치인이 자신의 입장을 지키고자 하는 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논의와 대화를 원천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그 입장에 크든 적든 어떤 결함이 발견되었음에도 재검토를 외면한다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인 이전에 상식인의 자세에 반한다.
    옳든 그르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신뢰를 더 소중한 원칙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름의 원칙이 박근혜씨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알량해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박근혜씨가 나름의 원칙이 있는 것처럼 이 나라 보수 세력에게도 나름의 원칙이 있다. 수도분할은 이 나라 정통 보수 세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어떤 명분으로도 찬성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박근혜씨는 현재 여야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차기 대권 주자다. 범 보수 세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보수정권 재창출의 보증수표가 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다. 그런데 박근혜씨는 지금 범 보수 세력에 심각한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세종시 원안을 고집하는 한 보수의 입장에선 박근혜씨를 지지해줄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씨는 자신의 의도가 무엇이든 지금 보수 세력에게 참으로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보수의 원칙을 지키자니 가장 강력한 차기주자를 포기하는 것이요, 그 주자를 지키자니 보수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보수의 원칙을 포기한 정권 재창출은 이미 보수정권의 재집권이라 할 수 없게 된다.
    박근혜씨가 끝끝내 이 딜레마를 강요한다면 그가 자신의 원칙을 소중히 하는 것처럼 보수도 스스로의 원칙을 소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이 설사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해도 불가피하다. 보수의 입장에선 긴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때 나라를 위해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개인이 정권을 잡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보수의 원칙이 지켜지느냐 아니냐이기 때문이다.

    친박계, 지금 정상적인가?

    김무성 의원은 줄곧 친박계의 이른바 좌장으로 불렸다. 그런데 그가 당초 세종시 원안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수정론을 제기하자 박근혜씨는 단 한마디로, 말하자면 ‘진압’해 버렸다. 그리고 이후 친박계 의원 어느 누구도 ‘감히’ 박근혜씨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를 볼 수가 없었다.
    최근 친박계의 또 다른 중진 홍사덕 의원이 9개 부처가 아니라면 5~6개 부처라도 이전하는 것으로 타협해야한다는 주장을 했을 때도 그랬다. 박근혜씨는 개인의견이라는 한마디로 단 칼로 베듯이 일축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친박계 의원들은 마치 군사 열병식을 하듯이 일사불란하게 박근혜씨 앞으로 정치적으로 도열하여 원안 사수를 외치고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자는 통속적인 말이 떠오른다. 박근혜씨의 정치적 위세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전적으로 기대고 있느냐는 힐난을 하지는 않겠다. 의원이 배지 걱정 하는 것을 누가 탓하랴! 다만 친박계 의원들은 과연 단 일말의 다른 생각도 없는 것인지는 묻고 싶다. 둘 중 하나다. 만약 다른 생각이 전혀 없다면 그것도 문제고, 다른 생각이 있는데도 입을 다문다면 그것 또한 문제다.
    대통령을 두고 독주니 뭐니 말들이 많았고 아직도 그렇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경우 친이계라면서도 때로는 대통령과 그 주변에 대해 반기를 든 의원도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씨의 경우 대통령이 되기도 전인데 그 주변에 다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을 그 어느 누구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이며 바람직한 것인가? 왕조시대 왕에게도 이러지는 않았다.

    머리는 머리카락을 키우는 화분이 아니다. 머리는 생각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은 언제나 다양하기 마련이다. 그 다양성 속에서 좋은 생각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장하고 그래야 발전이 있다는 게 민주정치의 믿음이다. 그런데 아직 대통령이 되기도 전인데 입 한번 제대로 뗄 분위기도 없다면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과유불급이라는데……

    박근혜씨는 잠재적 차기 주자 가운데 압도적인 지지율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지지율은 단지 지지율인 뿐 그것이 차기를 확정짓는 것도 아니며 또 설사 차기가 확정됐다 해도 지금은 대통령이 아니다. 그런데 박근혜씨와 그 주변은 집권을 해서도 결코 보여서는 안 되는 태도들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씨에게는 열광적인 묻지마 지지층이 있다. 그런데 그 하나인 박사모니 하는 노사모 비슷한 부류의 누군가가 이명박 대통령을 출당시키라고 주장하고 나왔다. 이 나라가 소위 표현의 자유가 있는 민주국가이니 자기 입 가지고 하고 싶은 말 하는 걸 말릴 수는 없겠다. 허나 이런 앞뒤 없는 묻지마 군상들이 나중에 어떤 모습을 보일지 생각하면 이전 노빠들의 난리법석에 넌더리를 냈던 일이 생각나 미리부터 두통이 난다.
    이 지점에서 국민을 한번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우리 국민은 애정도 강하지만 실망하면 무섭게 돌아서기도 한다. 예로부터 과유불급이라 했다. 그런데 지금 정도가 지나치다는 얘기가 도처에서 나오고 있다. 박근혜씨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에서조차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앞뒤 계산 없이 자신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것은 당사자의 자유다. 그 대가는 자신의 몫이라는 말은 속물적 계산처럼 느껴질 터라 건네지 않겠다. 따지고 보면 대가는 그 자신만이 아니라 한 때 애정과 기대를 가졌던 모두가 지게 될 것이니 불필요한 얘기겠다. 다만 한 가지, 그 언행을 지켜보고 냉정히 평가할 권리가 타인에게도 있음은 말해 두고 싶다. 이른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