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 '광화문에서'에 이 신문 정연욱 사회부 차장이 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 워싱턴 근교 랭글리에 있는 중앙정보국(CIA) 본부의 중앙 홀에는 검은 별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진 ‘명예의 벽(The Wall of Honor)’이 서 있다.

    1947년 창설 이후 CIA 요원들이 작전 도중 순직할 때마다 CIA는 이 벽에 검은 별을 하나씩 새겨 넣었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CIA 요원들은 죽어서도 빛이 없는 검은 별로 남아야 한다.

    ‘명예의 벽’ 한가운데에는 ‘명예의 책(Book of Honor)’이 있다. 이 책엔 CIA 요원들의 순직 연도와 순직자 이름이 적혀 있다.

    시간이 흘러 보안의 필요성이 없어지면 CIA는 순직 연도와 검은 별로만 표시돼 있는 같은 줄의 빈 공간에 이름을 적어 넣는다. 하지만 그가 수행한 임무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이름의 복원이 CIA가 순직 요원에게 바치는 마지막 예우다.

    더글러스 매키어넌.

    ‘명예의 책’에 첫 순직자로 기록된 1950년 검은 별의 주인공이다.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기상학을 강의하던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 항공사령부의 암호해독 책임자로 ‘변신’한다. 이후 중국 내륙에 들어가 기상관측소를 운영하며 B-29 폭격기의 작전을 위해 기상정보를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중국에 남은 그는 국무부 소속 부영사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그의 업무는 영사 업무와 거리가 멀었다. CIA의 비밀 임무가 계속된 것.

    매키어넌이 공산화한 중국을 탈출한 것은 1949년. 타클라마칸 사막과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7개월 만에 티베트 국경에 가까스로 도착했지만 국경수비대의 총탄에 맞아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다.

    CIA를 역할 모델로 삼은 국가정보원에도 별이 있다. 국정원 내 국가기록관에 걸린 46개의 별은 대한민국을 위해 묵묵히 책임을 다하다 스러져 간 익명의 국정원 요원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국정원은 1961년 중앙정보부로 출범해 수차례 명칭이 바뀌면서도 정보기관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정치공작의 시비에 휩싸인 굴절의 역사도 있었지만 묵묵히 음지에서 스러져 간 46개의 별이 정보기관의 존재 의의를 웅변하고 있다.

    국정원장에게 최고 정보기관의 수장(首長)다운 처신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국정원의 고유한 위상과 임무 때문이다. 하지만 김만복 국정원장은 그동안 정보기관의 수장답지 못했다.

    17대 대통령선거 전날 방북해 북한의 통일전선부장과 나눈 대화록 및 방북경과 보고서를 통째로 언론사와 지인들에게 유출한 것은 비밀 유지가 생명인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사건으로 현직 국정원장이 검찰의 조사를 받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김 원장의 사표 수리를 유보하며 버티는 청와대의 모습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김 원장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납치된 젊은이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활약상을 홍보하고, 비밀 협상을 벌인 ‘선글라스 맨’을 언론에 치켜세우는 장면은 아직도 낯 뜨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지켜보는 국정원 직원들의 표정은 착잡하다. 누구보다 정보기관의 생리에 정통한 ‘국정원 맨’ 출신의 첫 수장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