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대 대선은 한국사회에서 진보 노선을 고수해오던 정치세력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1987년 이후 민주화의 가치와 성과를 독점해오며 자기 혁신에 관대했던 진보 세력은 이번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이 국민적 염원과 관심으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깨닫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정당임을 자처해오던 민주노동당은 지난 대선의 3.9% 보다 25만 표 가까이 감소한 3%의 저조한 지지율을 기록하며 총체적 위기에 빠져들었다. 이번 대선 투표율이 16대 대선보다 7.8% 감소한 63%를 기록했다는 점과 민주노동당이 이미 10석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원내 정당으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번 선거결과는 그 동안 민주노동당이 펼쳐왔던 정치활동에 대해 국민다수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달성된 지 20년이 흘렀고 IMF 사태 이후 10여 년간 경제적인 양극화가 심화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사회에서 진보 정당의 출현은 자연스런 정치 과정의 일부로 인식될 수 있다. 경제발전은 사회의다원화를 가져오고 이 속에서 소외 받는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진보 정당의 존재는 보수 정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국민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활력소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민주노동당의 참패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 물음은 민주노동당이 추구하는 진보적인 가치와 정책의 지향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와 맞물려 있다.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진보가 한국사회와 양립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요소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민주노동당의 이념이 한국사회의 긍정적인 부분을 계승발전하고 부정적인 부분을 치유할 수 있는 논리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둘째,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정강과 정책을 제시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국정운영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셋째, 정당내의 조직문화가 민주적이고 다원화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스스로를 쇄신할 수 있는 개방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가?

    첫째 조건은 한국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시장경제와 그 동안 이룩한 경제적 업적에 대한 성과를 인정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둘째 조건은 민주노동당이 사회를 분열과 대립의 장이 아닌 상생과 통합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수권정당으로서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의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 마지막 조건은 민주노동당이 파벌과 당파성으로부터 자유롭고 외부의 비판에 유연한 대응을 할 정도로 성숙된 조직문화를 지니고 있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민주노동당은 위의 세가지 조건 중 어떤 것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노동당은 한국사회의 눈부신 진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개발독재의 성과를 부정하고 있다.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빈곤과 궁핍에서 한국사회가 벗어날 수 있었던 원인이 박정희의 발전전략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이는 박정희 이후의 정치적 과제가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동시에 과도기적 과정에서 발생했던 부작용을 치유하는 것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개발독재 시절 발생했던 부분적인 오류를 바탕으로 박정희가 이룩한 과업 전체를 역사에서 지우려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더구나 박정희 지우기의 목표가 북한정권에 대한 평가절상을 위해 추진되는 전술적 차원의 의도라면 이는 국민적 지지와 동의로부터 민주노동당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길일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노동당의 집권슬로건과 행동강령은 한국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기 보다 오히려 계층간 대립을 부채질하고 있다. 더욱이 원내 진출 이후 민주노동당은 안정적인 국정운영의 동반자로서의 역할과 자질을 입증하는데 실패했다. 민감한 국정운영의 이슈를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적 원칙에 입각해 타결하기 보다 '아스팔트정치'를 위한 호재로 사용하며 사회적 반목과 대립을 조장하는 역할에 앞장서 왔다. 민주노동당의 지도자와 당원들이 보여준 정치행위는 이들이 여전히 아마추어적인 사고와 관습에 물들어 있으며 민주적 합의와 룰을 이행하기 보다 소수의 전위부대를 동원한 물리적 압력의 행사에 익숙해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장면이다.

    끝으로 민주노동당의 조직과 운영체계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 민주노동당내에 존재하는 최대 파벌인 민족자주계열은 아직도 북한체제에 대한 환상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이미 도산된 정치체제를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강제적인 억압과 통제 밖에 없듯이 민주노동당 내의 주체사상 신봉자들은 파산된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령제일주의에 기반한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조직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대다수 국민을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 빠뜨리면서 이미 그 폐해를 만천하에 공표한 주체사상을 당내 이데올로기로 옹립하기 위해 물리적 언어적 폭력에 의존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지 모른다.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봉건적이고 왕조적인 구시대의 퇴물을 부여잡기 위한 몸부림을 진보라고 지칭하는 시대착오적인 '종북(從北)주의'자들이 존재하는 한 민주노동당을 지지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진보의 본질은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분배의 불공정과 사회적 불평등을 수정하는 작업이지 민생고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구체제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원칼럼니스트의 칼럼 내용은 뉴데일리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