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대 대선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로 진보세력에 대한 국민의 외면을 들 수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의 지표를 둘러싸고 전개됐던 보수-진보간의 치열한 대결구도는 이번 대선에서 자취를 감추고 후보들간의 합종연횡과 네거티브 공세만이 유권자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고 있다. 사실 이번 대선이 각 대선 진영의 정책과 비전을 검증하며 한국사회의 진로를 모색하는 자리이기 보다 후보자를 근간으로 한 인물중심의 경쟁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치러진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집권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연이은 참패는 민심이 참여정부를 떠났음을 거듭해서 확인시켜 주는 자리였다. 하지만 반복되는 국민의 경고를 무시한 채 허울만 남은 민주화의 가면을 뒤집어 쓴 집권세력은 소모적인 이념논쟁을 통해 사회를 통합하기 보다 분열시키는 작업에만 전념해왔다. 그리고 정치적 무능력과 무기력에 대한 국민적 비판을 원대복귀를 꿈꾸는 수구세력의 참주선동 정도로 매도하며 자신들이 여전히 도덕적 권위와 시대정신에서 우위에 서 있다는 망상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대선을 코 앞에 둔 시점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집권세력은 당명을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꿔 단 채 정책논쟁을 통한 보수-진보간의 대결구도를 포기하고 야당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 선전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현재 진행되는 여당후보의 선거 캠페인에서 지난 5년에 대한 평가와 미래에 대한 전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권력의 늪에 빠져든 진보세력이 장기적 차원의 정치적 자산을 구축하는 작업을 포기한 채 임박한 정치생명 연장에만 연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보세력의 정치적 몰락이 비단 집권층에서만 발생한 현상은 아니다. 지난 총선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원내에 진출한 민주노동당 또한 지지부진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총선과 대선 당시 소수이지만 의미 있는 지지자들이 보여주었던 지지와 연대의 물결은 이미 실종된 지 오래이다. 스스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진보적인 의식의 집합체라고 자처하던 민주노동당은 대선기간 진보적인 어젠다를 공개적인 논쟁의 장에 끌어들이는 작업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지난 총선에서 확보했던 지지율을 수성하는 것 조차 버거운 상황으로 전락했다.

    10년 전 한국의 유권자들은 경제위기로 인한 삶의 고통을 초래한 근본 원인으로 한국의 부패한 보수세력을 지목했다. 기존 보수세력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냉혹했으며 이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로 하여금 당시 한국사회에 형성되어 있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도록 허락했다. 기존 보수세력에 대한 회의와 염증은 민주노동당과 같은 좌파세력에 대한 국민의 기대 또한 한껏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던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혁파하고 대체이념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파괴와 도전이 불가피했다. 이것이 지난 10년간 한국 사회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라질 수 밖에 없었던 주된 원인이었다.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은 이후 추진했던 최우선 과제는 박정희 정권 시절 이룩한 경제발전 업적을 폄하하는 것이었다. 지난 5년간 참여정부 아래에서 박정희를 평가절하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행해진 것은 어찌 보면 진보세력이 치러야 할 자기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성장은 유능한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박정희 개인의 능력이 아니었다며 공개적인 석상에서 박정희를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박정희의 성과를 깎아 내리기 전에 왜 똑같이 유능한 대한민국의 공무원을 데리고 현 정부는 눈부신 경제적 업적을 이룩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답이 선행되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지난 5년간 한국의 공무원이 10만 명 가까이 증원되었다는 점도 첨언하고 싶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또 다른 비난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와 관련이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박정희 정권은 비자주적인 정권이었으며 냉전 치하에서 미국의 꼭두각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파견한 참여정부 하에서 왜 똑같은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자칭 진보세력이 후한 점수를 매기는 유일무이한 주체의 나라 북한은 같은 기간 수백만 명이 넘는 인민이 기아로 고통 받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산업화의 성과 없이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뜨거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민주화가 경제성장을 제고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5년의 경험을 돌이켜볼 때 우리는 산업화를 통해 이루어진 물질적 성과를 계속해서 이어갈 때에만 민주주의도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발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난과 빈곤에서 허덕일 때 산업화를 통해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던 박정희의 개발전략은 당시 정치지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진보적인 가치였다. 반면 한국의 민주화가 달성된 시점에서 진보세력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파산선고 받은 북한의 통일전략을 답습하며 “코리아연방공화국”을 대선구호로 주창하거나 북한의 대남전략에 휘둘리기만 한다면 이들을 더 이상 진보주의자로 지칭할 이유가 없다. 이들은 단지 진보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치적 기득권을 공고히 하려는 또 다른 수구세력에 불과할 따름이다.

    <객원칼럼니스트의 칼럼 내용은 뉴데일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