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대전 이후 무수히 많은 나라가 신생 독립국가로 세계무대에 등장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 중 제도적 절차로써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는 많지 않다. 이는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과 전쟁의 참화를 딛고 반세기라는 짧은 기간에 한국이 이룩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유사한 인근의 동아시아 국가들을 한 틀에 묶어 서구 국가와의 차별성을 비교 분석하여 설명하는 이론들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던 적이 있다.

    경제발전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정착과정을 설명한 기존의 많은 연구들 또한, 서구의 근대화 이론부터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설명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이론들이 서구의 논리를 한국사회에 적용하기 위한 고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위와 같은 노력이 이룩한 성과들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마음 한 구석에는 왜 모든 이론가와 정책가들이 한국사회를 분석하는데 있어 서구의 경험과 논리를 그대로 대입하는 것에 급급해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 원인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정착하는 과정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을 가로막는 논의와 편견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연구자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접근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편견 중 하나로 지역주의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가 지역주의의 병폐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통합된 사회의식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지역주의에 대해 체계적으로 토론하고 연구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은 지역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은 사회화의 초기 단계부터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왜곡되고 편향적인 정보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채 지역주의를 ‘한국적 천형’으로 간주하는 것에 익숙하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지역주의의 기원과 지역주의가 한국 사회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력에 대해 체계적으로 학습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지역주의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우선적으로 형성하기 시작한다.

    지역주의 병폐가 가져오는 이런 해악은 학문을 수행하는 연구자들조차 지역주의에 대한 주관적 관념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즉, 적지 않은 연구가들이 특정한 사회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추상화된 개념을 만들고 이를 통해 연구대상의 변천과정과 결과를 설명하기 보다 사전에 형성된 주관적 가치와 사고에 입각해 사회현상을 재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주의가 가장 극심하게 대두됐고 이를 고착화시키는 분기점으로 작용한 것이 1987년 대통령 선거였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후 지역주의는 한국사회의 발전과 통합을 가로막기만 하는 공공연한 적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필자는 이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 비록 지역주의가 한국사회에서 역기능을 수행했다 할지라도 지역주의가 한국사회 병폐의 모든 원인으로 치부될 만큼 체계적인 연구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선 개발독재 시절 재야의 정치세력이 제도정당의 형태로 정치권에 안착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묻고 싶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이 군사정권 하에서도 정치세력을 규합하며 권력에 도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그들을 밀어주는 지역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산 없는 김영삼, 호남 없는 김대중을 한번이라도 상상할 수 있었던가. 둘째, 민주화 세력이 어떻게 제도정치권에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비록 민주화 세력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더 필요하다 할지라도, 수도권 지역에서 조차 제도정당에 흡입된 민주화 세력은 특정지역 출신의 유권자 비율을 바탕으로 해서 정당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민주화 세력이 민주화를 앞당긴 것이 아니라 지역적 기반이 민주화 세력의 제도권 진입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직선제가 실시된 1987년 대선 이후 각 정당의 정치지도자들은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지역연합을 주된 모토로 걸고 나왔다. 1992년과 1997년 대선에서는 지역연합을 성공적으로 결성한 정치세력이 집권정당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2002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지에 힘입어 호남에서 절대적인 후원을 받은 현집권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세력의 존립과 이후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든 제도적 원천이라는 긍정적 측면에서 지역주의를 소화해낼 수 있는 학문적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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