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 '광화문에서'에 이 신문 박제균 정치부 차장이 쓴 '반칙의 도(道)'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잊혀진 말엔 향수(鄕愁)가 있다.

    최근 이에리사 태릉선수촌장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단어와 맞닥뜨렸다. ‘이질 러버’. 그래 ‘이질(異質) 러버(rubber)’였다.

    한자어와 영어가 결합된, 이 요상하고 촌스러운 단어는 197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닌 이들에겐 낯설지 않다.

    1973년 유고의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한국은 단체전에서 우승하면서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세계 제패의 위업을 이뤘다. 그 여파로 전국에 탁구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우리 10대들은 열심히도 탁구채를 휘둘렀다.

    이런 탁구 열풍에 충격파를 던진 것이 바로 ‘이질 러버’였다. 1975년 인도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당시 중공(中共) 선수들이 들고 나온 신병기 탁구 라켓에 한국은 무참히 패한다. 라켓의 양면에 서로 다른 성질의 고무를 붙였다 해서 ‘이질 러버’로 불렸다. 당시에 왜 ‘이질 러버’ 사용이 반칙이 아닌지 분통을 터뜨렸던 기억이 있다.

    요즘 골프장에도 갖가지 신병기가 난무한다. 샤프트 끝이 둘로 갈라진 퍼터, 머리빗처럼 모래가 빠져나가는 샌드웨지, 규정 용량보다 헤드가 큰 드라이버…. 모두 반칙이다. 같은 채인데 탁구채는 합법이고 골프채는 ‘불법 무기’다.

    이런 반칙은 주말 골퍼들에겐 애교지만, 더러는 애교로만 봐줄 수 없는 반칙들도 있다. 상습적인 볼 터치, 잃어버린 볼을 바꿔치기하는 속칭 ‘알까기’가 그런 것이다.

    그래도 반칙에는 최소한의 미덕이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적어도 기본적인 ‘게임의 법칙’이나 승패의 결과를 인정한다는…. 그래서 ‘알까기’를 하려는 사람도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자기가 졌다고 게임을 무효로 해 버리거나 함께 경기하는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팀에 가서 골프채를 휘두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건 반칙의 차원을 넘어서는 ‘깽판’이다.

    이런 상식 밖의 일이 2007년 한국의 대선판에서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한나라당 탈당 및 대통합민주신당 경선 출마, 국정 실패의 딱지를 떼어내려다 결국 도로 열린우리당이 된 대통합민주신당의 엎치락뒤치락 창당사, 처음부터 ‘단일화’를 들고 나온 ‘반쪽 후보’의 양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 번복과 이인제 전 경기지사의 경선 불복의 피해자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정계 은퇴 번복과 사실상 경선 불복….

    더 큰 문제는 정상적인 나라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이런 일을 국민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정도로 무뎌졌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기본적인 게임의 법칙을 깨 버린 노무현 정부의 해악이 크다는 생각이다. 행정수도 건설이 위헌 판결을 받자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세우고, 선거에서 떨어진 이에게 장관 자리로 보상하는 정권에서 승패 관념은 마비돼 왔다.

    이 전 총재는 1997년 대선 때 김 전 대통령의 정계 은퇴 번복을 두고 ‘청소년 교육에 합당한가’라고 쏘아붙였지만, 청소년 교육 차원만이 아니다. 게임과 승패의 기본 규칙을 깨는 데 무감각해지는 것은 국기(國基)를 흔들 뿐 아니라 인간세(人間世)를 황폐하게 만든다. 반칙을 할 때 주심의 눈치를 살피는 소심한 ‘반칙왕’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