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회창씨처럼 원칙으로 성공한 사람도 드물고, 원칙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도 드물다. 이씨는 정권 눈치 보지 않고 원칙을 지킨 대쪽 판사라는 평판 덕에 여·야당의 대통령 후보를 두 번이나 했다. 그런 만큼 그는 늘 상대방으로부터 “원칙주의자라면서 원칙을 더 안 지킨다”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 원칙을 놓고 벌어지는 싸움은 더 격앙되기 마련이며, 피해도 더 크다. 이씨가 아들 병역 문제로 남들보다 더한 타격을 받은 것이나, 광범위하게 퍼진 반(反)이회창 정서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것 모두 이 원칙 싸움의 결과였다.

    이씨도 원칙을 여러 번 어겼다. 세풍(稅風) 사건도 있었고, 불법 선거 자금도 받았다. 그때마다 “대쪽이라더니…”라는 비아냥거림이 폭풍처럼 그를 때렸다. 이씨는 이 길을 걸으면서 원칙의 문제만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남들보다 몇 배 더 고민해야 했다. 비록 스스로 지키지는 못했지만 우리 정치사에서 이씨처럼 원칙의 문제를 놓고 고뇌를 거듭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씨는 2002년 대선에서 패한 다음 날 정계은퇴를 국민 앞에 선언했다. 그 회견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자기 인생의 전부를 결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그 자리에서 그가 국민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도 결국은 ‘원칙’이었다. 이씨는 “6년 전 정치를 시작해 법과 원칙이 바로 선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저의 소원이자 신념이었으나 제가 부족한 탓에…”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회견문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이씨는 2년 뒤 대선자금 사건 때문에 다시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국민들께 사죄드린다”고 했다. “원칙주의자로 행세해 놓고…”라는 자괴감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이씨는 그때 “저는 평생을 학(鶴)과 같은 삶을 살기를 동경했으나 진흙탕과 같은 정치의 마당에서 저의 이런 꿈은 허망한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점에 저는 지금까지 제 삶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참담한 심정으로 되돌아봅니다”라고 했다. 과거 그를 취재했던 필자는 이 말만은 이씨의 진심이라고 믿는다.

    그 2년 뒤 2006년 청와대 고위관계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씨 얘기가 나왔다. 당시 이씨는 강연 등 외부 활동을 부쩍 늘리고 있었다. “이회창씨가 다시 정치를 하려는 것이다” “아닐 것이다”는 전망이 엇갈렸다. 청와대 인사는 “아니, 아직도 그 문제를 갖고 왈가왈부하느냐”고 한심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이씨의 대선 출마는 기정사실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필자는 그것이 상대방 분열을 바라는 청와대측의 희망 사항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씨가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면 청와대 인사가 이씨를 더 정확히 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이씨의 출마를 믿기 어려운 것은 원칙을 지키는 학(鶴)이 되기를 바랐던 그의 소원은 가짜가 아니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명박 후보가 불안해서 출마를 검토 중”이라고 한다. 진심일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가 문제가 많아서 낙선하면 그것도 국민의 선택일 뿐이다. 한나라당이 꼭 돼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씨는 2002년 대선에서 패한 날 밤 “이것이 나의 운명인가 보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지금 이씨가 정말로 하려는 것은 자신의 이 운명을 바꿔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대가로 자신의 평생 소원이었던 원칙을 버리려 하고 있다.

    이씨는 ‘존경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답했다. 그는 로마의 철인(哲人)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듯 스스로를 ‘막이 내리기도 전에 무대를 떠나야 했던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우렐리우스도 자신의 불행한 운명 앞에서 고뇌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나는 나의 운명을 탓하지 않고 내 인생의 원칙에 대한 시험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자신의 운명과 소원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을 이씨가 좋아하던 황제의 명상록을 한번쯤 손에 잡아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