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이 이룩하는 경제발전이 예사롭지 않다. 1978년 등소평이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제기한 이후 중국은 서구 경제질서로의 적극적인 편입을 시도해왔다. 중국의 경제성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 중 하나로 학자들은 국내총생산 (GDP)를 자주 언급한다. 얼마 전 중국 우한 (武漢) 과학기술대학 동등신 (董登新) 교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중국의 GDP가 20조 원(元)을 돌파했다. 이를 미국 달러화와 연계해 고정환율로 환산해 보면 중국은 이미 미국, 일본, 독일 다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 나라의 국부가 증가하면 당연히 그 나라의 정치적 영향력도 증대하게 된다. 세계경제 1위인 미국은 물론 일본과 독일 모두 국제사회에서 그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국가이다. 특히 일본과 독일은 2005년 UN안전보장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하려다 실패한 전력이 말해주듯 자국의 경제력에 어울리는 정치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면 중국 또한 세계 정치무대에서 자국의 국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일 것이며 이는 결국 주변 국가와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독일의 사례가 입증하듯 대부분의 국제정치 역사는 하나의 강대국이 새롭게 등장하면 주변 국가들이 자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신흥강국에 맞서 힘의 균형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존의 강대국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질서에 변화를 꾀하기 위한 신흥강대국의 시도는 결국 강대국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바로 국제정치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주의 이론이 강조하는 '세력균형'과 '패권전쟁'의 논리이다.

    현실주의 논거에 따르면 오늘 날 세계질서의 근본적인 재편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의 원천은 중국으로부터 온다. 미국과 일본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교역국이 된 중국을 지척에 두고 있는 우리가 중국의 강대국화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요인이다.

    하지만 서구의 경험을 받아들이고 이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서구 국제정치 논리의 근거를 제공한 역사적 경험이 서구의 사례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즉,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력이 향상되고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서구의 논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에 부합하는지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필요가 있다.

    서구의 강대국들이 아시아를 본격적으로 침범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부터이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의 근대문물을 도입하고 일찌감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선언한 것을 제외하면 중국과 한국 등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국제질서를 이룩하고 있었다.

    중화주의를 근간으로 한 동아시아와 달리 서구의 국가들은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의 체결과 함께 국가 상호간에 평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근대적인 주권개념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평등을 강조하는 주권국가의 개념과 달리 서구의 국제질서는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분할통치 및 식민지 확장 전쟁으로 이어지며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의 법칙으로 점철되었다.

    이와 달리 동아시아는 주권국가의 개념이 없고 중국과 주변 국가간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비대칭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서구에 비해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500년 이상의 안정을 유지해 오던 동아시아 질서는 주권국가간의 평등을 주창하는 서구의 도래와 함께 붕괴되며 대부분의 국가들은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늘 날 한국은 19세기 말 두 개의 거대한 국제정치 질서가 요동치며 굉음을 울리던 그 시절을 다시 목도하고 있다. 오랫동안 국제사회에서 소외되던 중국이 용틀임을 시작하며 미국 위주로 구성된 서구질서의 축을 흔들고 있다. 중국이 지금과 같은 성장을 지속하고 미국이 이를 자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면 한반도는 다시 한 번 두 개의 세력이 정면 충돌하는 한 가운데 위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가정이 현실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미래를 대비하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그 시발점은 동아시아에 고유하게 내포되어 왔던 조화와 상생의 질서를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오늘 날 국제정치에 적용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