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철 들자 망령 난다는 속담이 있다. 다 늦게 철듦에 대한 개탄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편찬한 이담속찬(耳談續纂)이라는 속담집에도 나오는 말로 세월이 빨라 어물어물하다간 나이만 먹으니 일할 때를 놓치지 말라는 경구(警句)이기도 하다.

    요즘 정치권을 두고 생겨난 속담이 아닌가 싶다. 드잡이만 하던 청와대와 국회가 임기 말이 가까워져서야 정치를 좀 하는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으로 촉발된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 논란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청와대와 (구)여권과 야당 등 모든 정파가 (기자의 기억으로는) 이 정권 들어 처음으로 대타협을 이뤄낸 것이다. 물론 논란을 미봉함으로써 구체적인 내용에 들어가면 정치 주체들 간에 동상이몽의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일단 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지 않고 다음 18대 국회에서 개헌 문제를 매듭짓기로 합의했다.

    이번 대타협은 정치가 뭔가를 보여줬다. 노 대통령과 각 정파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한 발짝씩 양보함으로써 모두 적당한 선에서 명분과 실리를 챙긴 셈이다.

    먼저 노 대통령의 경우,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18대 국회 초반에 개헌 문제를 처리할 테니 개헌안 발의를 유보해달라”는 원내 6개 정파의 합의 요청을 수용함으로써 오기 정치를 한다는 그간의 비판을 무디게 만들었다. 또 막연한 표현으로나마 18대 국회에서 개헌 문제를 매듭지겠다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개헌 반대 여론으로 진퇴양난이었던 곤경에서 물러설 명분과 실리를 함께 거뒀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야당들과 청와대를 설득해 개헌 논란 종결의 대타협을 이끌어냄으로써 모처럼 정치력을 발휘했다. 발의하면 부결될 게 분명한 개헌안을 갖고 고민하던 노 대통령을 구해준 묘수로 평가받고 있다. 장기화될 경우 정국 최대의 불안 요소가 될 개헌이라는 시한폭탄의 뇌관을 제거함으로써 정국 안정에 주도적 역할을 해냈다. 개헌안이 발의될 때 처리를 둘러싸고 져야 할 자신과 한나라당의 짐도 던 셈이다.

    한나라당의 경우, 열린우리당의 ‘6개 정파 합의’ 제안에 동참한 데 이어 다소 무리라고 할 수도 있는 청와대의 ‘합의사항 당론 채택’ 요구까지 수용함으로써 노 대통령에게 사사건건 반대만 한다는 이미지를 많이 희석시켰다. 원내 제1당으로서의 금도를 발휘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개헌 논란이 장기화할 경우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진행돼가고 있는 대선 정국에 변수가 생길까 우려했는데 이번 종결로 그러한 우려를 씻어내는 수확을 얻었다.

    청와대와 정치권이 진작부터 이처럼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서로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았으면 많은 게임에서 윈윈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갈등과 대립의 최소화로 국리민복에도 크게 기여했을 것이고. 임기 말에야 철이 든 것은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늘그막에나마 철 든 것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철이 전혀 안 들고 망령이 난 것에 비하면 말이다. 우리 정치는 그동안 싸우느라 미뤄놓은 현안이 산적해 있다. 국민연금법, 사립학교법을 비롯한 각종 법안과 한·미 자유무역협정, 부동산 정책, 대입 3불(不)정책, 대통령 선거 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다. 이들 현안은 정파 간 입장이 판이하고 사람마다 이해가 엇갈려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정파 간에, 이해당사자 간에 주고받는 지혜와 타협이 더욱 필요한 사항들이다. 정치권이 대립과 갈등으로 허송하자면 짧지만, 뜻을 모아 일을 하자면 결코 짧다고만 할 수 없는 게 대통령과 국회의 남은 임기다. 모처럼 철이 든 것으로 보이는 정치권이 노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 모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싹 가실 만큼 남은 임기 동안 정치다운 정치를 보여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