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에 전봉관 KAIST 인문과학부 국문학과 교수가 쓴 '3불(不), 가난한 집 아이에게 더 불리하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EBS에서 방영된 노무현 대통령의 ‘본고사가 대학 자율인가’ 특강을 들으면서 우리 교육의 미래에 대한 대통령의 충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교육을 정치논리로 보지 말라는 비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학교와 학생, 학부형들만의 문제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 교육 정책이 선거의 당락을 좌우하고, 아파트값을 끌어올리고, 좌·우파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지금도 학부모의 학력과 소득 수준에 따라 대학 진학 기회가 달라진다”는 대통령의 진단은 정확하다. 필자가 근무하는 카이스트만 하더라도 가난한 집 자식은 드물다. 대통령이 ‘걱정’하는 것처럼 강남 부잣집 자식은 아니지만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이 대부분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지방 출신 명문대생이 적지 않았던 10여 년 전 필자의 대학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3불정책’이 정당하다는 대통령의 논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 사회가 계층 이동이 자유로운 열린 사회로 가기 위해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가난한 집 자식 숫자는 대폭 늘어나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교육환경과 입시제도는 가난한 집 자식에게 더없이 불리하다.

    항간에는 ‘자녀를 명문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능력’이라는 뼈 있는 우스갯소리가 떠돈다. 어머니의 ‘정보력’과 학생의 ‘체력’, 그리고 할아버지의 ‘경제력’이다. 입시제도가 너무 복잡하다 보니 어머니의 정보력이 필요한 것이고, 내신·수능·논술 등 갖가지 과외를 받자니 학생의 체력이 필요한 것이며, 아버지가 혼자 벌어서는 그 많은 과외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 할아버지의 경제력이 필요한 것이다. 가난한 집 자식에게 자신의 의지로 기를 수 있는 체력 외에 다른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고액 과외를 막기 위해 도입된 ‘쉬운 수능’도 공부 잘하는 가난한 집 학생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현재 수능시험 개별 문항의 정답률은 70% 내외이고, 일부 문항은 90%에 육박한다. 학생의 자질이 부족하면 아무리 과외를 시켜도 풀 수 없는 고도의 창의력을 묻는 문제는 수능 시험장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쉬운 수능은 난이도를 과외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으로 대폭 낮춘 결과, 과외를 많이 받은 학습능력이 부족한 부잣집 자식에게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한다.

    어릴 적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야 좋은 대학에 진학한다. 공부 잘하는 가난한 집 자식이 공교육 기관에서 공부 못하는 학생과 똑같은 ‘평준화 교육’을 받는 동안 부잣집 자식은 사교육시장에서 차별화된 양질의 교육을 받는다. 학교 선택권도 없고, 수준별로 반 편성도 못하는 학교에서 학원에 다닐 형편이 못 되는 가난한 집 영재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범재(凡才)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학이 대학별 고사를 요구하는 이유는 변별력을 높이겠다는 의도도 있지만 왜곡된 입시교육을 정상화시키겠다는 의도가 더 본질적이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은 3불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현재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에 할애한다. 그처럼 많은 공부시간을 창의력을 기르거나 통합적인 사고력을 기르는 데 쓰지 않고, 단편적인 지식을 쌓거나 실수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데 쓰고 있으니 학생은 물론 대학과 국가의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학이 요구하는 창의력과 통합적 사고력은 학원이 아니라 학교에서만 체계적으로 기를 수 있다. 다만 현재와 같은 평준화·획일화된 학교가 아니라 학생 수준에 맞는 맞춤식 교육을 할 수 있는 학교라야 가능하다. 사립대학에서 요구하는 기여입학제 역시 매년 4조원에 달하는 해외 교육수지 적자를 우리 대학의 발전에 쓸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일 뿐이다.

    3불정책과 평준화 교육하에서도 부잣집 자식은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있고, 국내에서 실패하면 해외에서라도 좋은 대학에 진학한다. 3불정책과 평준화 교육의 가장 큰 피해자는 공부 잘하는 가난한 집 자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