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에 이 신문 신효섭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5년 임기 중 1년은 마무리 기간으로만 삼기엔 너무도 긴 시간이다. 마무리의 마음이 아니라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흔히 임기 후반부를 하산(下山)에 비유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참여정부에 하산은 없다. 끝없이 위를 향해 오르다가 임기 마지막 날 마침내 멈춰 선 정상이 우리가 가야 할 코스이다.”

    문재인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12일 부하 직원들을 모아놓고 한 취임사이다. ‘이 정부에 임기 말 권력 누수(레임덕)는 없으니 마지막까지 세게 나가자’는 뜻으로 들린다.

    대통령도 1월 초 “레임덕이니 식물대통령이니 하는데 내가 가진 합법적 권력을 (임기)마지막까지 행사하겠다”고 했었다. “국민 평가를 잘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작년에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올해에는 (국민 평가를) 신경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도 했다. 문 실장은 대통령의 이런 의지를 청와대 직원들에게 복습시킨 셈이다. 대통령 주변의 386 비서들도 “이전 대통령들은 지역 기반에 너무 의지했기 때문에 임기 말에 쉽게 무너졌다. 그러나 우리는 국민의 정책적·신념적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레임덕은 없다”고 자신한다고 한다.

    모두 헛된 꿈이다. 임기가 정해진 민주국가의 권력자라면 임기 말에 힘이 약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정권 사람들 자신의 5년 전을 돌이켜 보라. 그때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보다는 ‘다음 대통령이 될 싹이 보이는 사람’에게 더 신경 썼을 것 아닌가. 그 정권에 잘 보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다음 정권에서 새 동아줄을 잡을 수 있을까’가 가장 큰 관심사였을 게 뻔하다. 지금이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정권의 권력 누수는 이미 ‘중증(重症)’인 게 현실이다. 대통령이 밀어붙이고 있는 한·미 FTA부터가 전망이 불투명하다. 여권 대선주자들이 “다음 정부로 미루라” “나를 밟고 가라”고 들고 일어나는 판이다. ‘FTA 총리’라는 이 정부 마지막 총리 후보의 국회 인준 여부까지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FTA에 반대하는 일부 여권 의원들의 시큰둥한 반응 때문이다.

    관료사회 사정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 경제부처는 청와대 파견 직원을 정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후보로 오른 사람들마다 손을 내저었기 때문이다. ‘정권 말기에 무슨 득을 보겠다고 청와대로 가느냐’는 게 공무원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몇 년 전 부처에서 청와대로 파견됐다가 최근 인사에서도 복귀하지 못한 한 공무원은 “친정 동료들로부터 ‘안 됐다’는 위로 인사를 받았다”고 했다. 고위 공무원들 중에는 한가한 자리를 자청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 ‘정권 말기에는 납작 엎드려 있는 게 길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세상 인심(人心)이고 순리다. 정권 사람들이 아무리 우기고 부정한다고 해도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일이다.

    정권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임기 말의 초조함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지막까지 주어진 책임과 역할을 다하되 겸손하고 차분하게 자신들의 시대가 저무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여유와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 끝까지 일을 벌여야만 존재를 과시하고 힘을 확인받을 수 있다는 건 정권의 착각일 뿐이다. 오히려 국민은 이 정권이 5년간 머무르고 관리한 산 정상을 말끔히 치워 다음 주인에게 물려주고 아무 사고 없이 산을 내려오기를 바라고 있다. 그게 이 정권이 나라와 국민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봉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