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 '중앙시평'란에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일반적으로 기존 체제의 변혁을 추구하는 것을 진보라 하고, 현상 유지와 안정을 선호하는 것을 보수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정의하면 모든 시대에 진보와 보수는 있었다. 그런데 진보는 좋고 보수는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결코 그렇지 않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경 말씀처럼 인간은 오랫동안 정해진 율법을 지켜야 하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근대에서 가치의 전도(顚倒)가 일어났다. 근대인은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는 과학을 통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법칙을 읽어 냄으로써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는 신념을 전파하는 과학적 사상이 나타났다. 이와 함께 새 역사 창조에 기여하는 진보는 좋은 것이고, 막는 보수는 나쁜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성립했다. 이 같은 근대의 가치판단을 종교적 교리처럼 신봉하는 자가 진보주의자다. 역사의 법칙에 따라 관철시킬 수 있다고 믿는 진보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좌파가 이런 진보주의자를 대표했다.

    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는 좌파 진보주의의 파산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는 계획경제보다는 시장경제가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진보는 시장을 폐쇄함으로써가 아니라 열어 놓음으로써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줬다. 노무현 대통령 또한 실제로 국가를 경영하면서 이 같은 진리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경제정책은 점점 더 신자유주의를 향해 나아갔다. 이러한 전향을 비판하는 좌파에 대해 그는 자신의 노선을 '유연한 진보'라고 옹호했다. 유연한 진보란 좋게 보면 '진보 없는 진보주의'에서 '진보주의 없는 진보'로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진보를 어느 특정 이념이나 관점으로 규정하는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다원적 진보의 시대가 도래했다. 백낙청이 민족통일의 관점으로 분단체제의 종식을 진보로 본다면, 최장집은 남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진보로 규정한다. 이에 반해 뉴라이트는 대한민국 국가의 선진화가 진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진보인가는 민족, 사회(계급) 또는 국가 가운데 무엇을 최상의 인식 범주로 해 현안을 보느냐로 결정된다.

    현재 진보 논쟁이 복잡하고 혼돈스럽게 전개되는 이유는 서로 다른 사고틀(frame)로 진보를 정의하고, 이에 입각해 이념투쟁과 정체성 논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복잡한 문제를 간단하게 정리하는 '오컴의 면도날'이다.

    문제를 하나씩 명확히 하면, 우선 2007년 대선에서 우리가 선출하는 대통령은 민족의 대통령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의 대통령이다. 다음으로 그 대통령이 성취해야 할 중요과제는 분단체제의 종식, 남한 사회의 양극화 해소, 그리고 대한민국 국가의 선진화다. 결국 논쟁의 초점은 이 셋 가운데 무엇을 최우선적 과제로 설정하느냐다. 이 논쟁을 꼭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으로 벌여야 할 이유는 없다.

    세계사적 상황은 이미 좌파와 우파라는 이념적 코드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시대를 넘어섰다. 사회주의를 경험한 옛 동구권 국가들에서 시장경제 옹호자는 진보파로, 공산주의자들은 보수파로 분류된다. 이데올로기를 잣대로 해서가 아니라 구체제의 개혁인가 옹호인가로 진보와 보수가 나뉜다. 이처럼 보수와 진보는 이데올로기 개념이 아니라 현실 개념이다. 현실을 위해 이데올로기가 존재해야지 이데올로기를 위해 현실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후자의 이데올로기는 그야말로 허위의식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 상황에서 정말 중요한 일은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으로 적과 아군을 갈라 권력투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분단체제.사회적 양극화.선진화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지혜를 다 함께 모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