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권영빈 논술고문이 쓴 '노무현식 어젠다의 시작과 끝'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정권 4년을 정리해 볼 때 가장 특징적인 게 어젠다(의제) 설정 방식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적으로 민감한 의제를 이슈화하고 이를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역대 대통령 중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다. 집권 7개월 만에 대통령은 재신임을 묻겠다는 폭탄 선언을 한다. 청와대 비서관이 기업 비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도덕성 적신호를 내세워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나선 것이다. 2004년 한 해는 재신임-탄핵-총선-헌재 결정으로 나라는 가위 논쟁의 용광로처럼 들끓었다.

    탄핵정국이 끝나자 국민은 바랐다. 갈등보다는 통합을 통한 경제살리기에 대통령이 주력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곧이어 등장한 게 수도 이전, 과거사 청산, 국가보안법 개폐, 신문법 개정 등이었다. 사안마다 민생과는 거리가 멀고, 사안마다 기성체제를 무너뜨리는 도전적 의제였다. 일부는 수정되고, 일부는 진행 중이며, 일부는 원안대로 통과됐다. 그렇게 한 해는 갔다. 지난해 새해 대통령의 화두는 양극화 문제였고 연말에는 임기 1년을 앞두고 개헌을 하겠다는 새로운 어젠다를 던진다. 재신임 선언에서 개헌론까지 지난 4년은 대통령이 던진 어젠다에 따라 여론이 들끓고 국민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살아야 했다.

    노무현식 어젠다 세팅은 첫째, 명분이 강하고 원론적이며 도덕성이 강한 의제를 택해 끝까지 몰아붙이는 명분 집착형 배수진이라는 특징이 있다. 여론조사가들이 말하는 사회적 욕구가 강한 의제를 설정해 자신의 지지도를 높이고 정면 승부를 하는 방식이다. '측근이 기업 비자금을 받았다, 나에게 돌을 던져라,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벼랑 끝 작전이다. 이 배수진 어젠다로 2004년 총선에서 여당은 압승을 거둔다. '친일 군부 세력이 3대를 떵떵거리며 산다, 유신 잔재는 박물관으로 가야 한다'는 게 과거사 청산 논리다. 이 호소가 먹히면서 당시 대통령 지지도 30%의 두 배를 넘는 여론을 확보할 수 있었다.

    둘째, 노무현식 어젠다는 그 자체가 갈등 분열적이다. 갈등 봉합, 통합 조정이 아니라 갈등 분열을 첨예하게 부각, 대립시킴으로써 지지세력 결집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탄핵이냐 반대냐, 친일이냐 반일이냐, 수도 이전이냐 고수냐, 보안법 개정이냐 폐지냐로 대립하기 때문에 타협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정치란 협상과 타협의 산물이지만 노무현 정부 들어서 협상과 타협의 결과물은 보기 어렵다.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다. 성장과 분배, 민족공조와 국제공조, 과거정리와 미래지향 등 모두가 선택 아닌 병행적 고려 대상임에도 어느 한쪽을 강요하는 쪽으로 이끈다.

    셋째, 노무현식 어젠다는 의도했든 안 했든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는 특출한 시공작전을 전개한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과거 존재는 분명하다. 독재, 반인권, 정경유착, 보수언론의 치부, 친일 문제 등 과거의 잘못을 밝혀 현 정권의 정당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고 기성체제를 몰아붙이는 과거 장악형 전략이다. 수도 이전-국토 균형 발전-서남해안 개발 등은 공간 제압을 통한 지역 지지기반 확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왜 임기 말 시점에서 개헌론을 새삼스레 들고 나온 것일까. 명분에 적합한 의제다. 독재 권력의 정권 연장을 막기 위한 장치가 5년 단임제였고 민주화 투쟁의 값진 승리였다. 민주화 20년 시점에서 4년 연임제로 환원하는 게 명분에 부합된다. 그렇다면 왜 여권이 분열된 이 시점에서 지지도가 바닥인 대통령이 이미 한번 접은 어젠다를 새삼 끄집어내는가. 이 질문 속에 답이 있다. 갈등.분열을 통한 자파 세력 결집으로 잘 되면 재집권, 못 돼도 야당으로서 '나는 그때 주장했었다'는 정치적 알리바이를 축적하려는 정치 공세라고 볼 수 있다.

    이탈한 여당 의원들까지 개헌을 반대하는 시점에서 대통령이 개헌을 진정 밀어붙이겠다면 하나의 전제를 분명히 달아야 한다. 개헌이 부결될 경우 대통령직을 물러나겠다는 입장 천명이다. 그래야 명분 집착형 배수진의 노무현식 승부수에도 맞고 소모적 논쟁을 조금이라도 앞당겨 끝낼 수 있다. 대선을 6개월이라도 앞당기는 게 나라나 대통령직의 표류를 막기 위해서도 나쁠 게 없다. 노무현식 어젠다는 그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끝날 것인가.권영빈 논설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