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신우 논설위원이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를 쓴 알렉시스 토크빌이 자신의 책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인 주제는 ‘평등’이었다. 그는 책의 상당 부분에 걸쳐 평등이라는 관념이 어떻게 인간의 행태와 사회를 변화시켜가는가를 깊이 탐구해놓고 있다.

    토크빌이 내린 평등의 정의는 독특하다. 평등이란 마치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게 되는 소금물과 같다. 즉 사회가 평등해지면 평등해질수록 구성원들은 더욱 더 타는 목마름으로 평등을 갈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거의 같은 수준이 될 때는 가장 미세한 불평등까지도 사람의 눈에 잘 띈다. 그러므로 평등이 완전해짐에 따라 평등을 바라는 마음은 더욱 강렬해진다.”

    토크빌은 평등이 품고 있는 혁명성을 누구보다 먼저 갈파한 사람 중 하나지만, 평등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우려했던 사람 중 하나다. 사람들은 일단 자유속에서의 평등을 요구하나 그것을 획득할 수 없을 때는 차라리 노예상태에서의 평등마저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자유를 잃은 평등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다.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에 휘둘리면서 어떻게 독재로 방향을 틀게 되는지를 토크빌은 일찌감치 지적하고 있었다. 마치 ‘부(富)의 균등 분배’ 를 외치며 권력을 잡은 후 베네수엘라 민중의 맹목적 지지를 바탕으로 법률을 자기 마음대로 제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 위임받게 된 차베스 대통령을 예견이라도 한 듯하다. 평등의 정치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이들 민중은 지금 노예상태에서의 평등마저 요구하고 있다.

    평등의 함정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베네수엘라 민중만이 아니다. 좌파 정부 4년간 끊임없이 분배와 평등의 세례를 받아온 한국 국민 사이에서도 지금 커다란 의식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지금 더 세고, 더 강렬한 평등의식을 당연시한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가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좋은 예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이념 성향은 전체적으로 진보에서 보수로의 회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국민 중 상당수가 자신의 입지와 상관없이 차기 정부의 이념성향을 ‘진보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가 82.2%나 차지하는 것은 이같은 흐름과 연관돼 있다.

    복지와 분배에 대한 욕구도 점차 강해지고 있다. 복지 강화(50.2%)가 감세(45.2%)를 앞지르고 있는 것이다. 평등과 분배로의 유혹은 마치 소금물을 들이켜는 것과 같다는 토크빌의 속삭임이 귓가를 맴돈다.

    이런 의식의 변화 속에서도 국민은 한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다. 평등과 분배를 외칠수록 우리 사회는 저성장의 함정에 빠져들어갔고 이런 과정에서 중산층은 붕괴됐으며, 신빈곤층이 양산되면서 소득계층별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다는 점이다. 최근 ‘노무현 정부 4년 평가’ 토론회를 가진 바른사회시민회의는 이같은 사태의 배경에는 “균형·분배·형평·복지 등 평등주의를 핵심기치로 내건 노무현 정부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이로써 끝이 아니다. 부자들이 밉다면서, 그리고 평등과 분배를 외치면서 유권자들의 의식을 마비시켜온 현 권력집단은 4년 여가 지난 이 순간 과연 어떤 삶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한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꼬집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노(무현) 정권 사람들이 서민이 겪는 민생고에 동참하거나 고통분담을 하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삶만큼은 경제주의 원칙에 충실하다는 데 있다. ‘신흥귀족’이라는 말을 듣는 이유다.”

    평등이나 분배 등의 포퓰리즘으로 국민을 중독시켜 놓은 후 자기네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신흥귀족으로 변신해 저 높은 세계의 삶을 향유하는 이 역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국민을 이데올로기의 포로로 만들어 놓은 자들이 요즘 들어 또다시 떼지어 몰려다니며 ‘서민을 위한 민생개혁’을 외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의 벌거벗은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