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3일자 오피니언면에 김일영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가 쓴 시론 '제도보다는 사람 탓이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현행 헌법의 5년 단임제가 한국 정치를 실패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주범인 양 매도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공격의 선봉에 섰다. 그는 “단임제가 책임정치를 훼손하고 임기 말에는 국정 운영까지 어렵게 만든다”고 하면서 “국정의 책임성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4년 연임제로 개헌하자”고 제안했다. 과연 그럴까.

    불행하게도 민주화 이후의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그다지 좋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실패’가 정말로 5년 단임제 때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4년 연임제였다면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를 맞지 않았을 수 있었고, 대통령 아들을 포함한 측근 비리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물론 5년 단임제이면서 대선과 총선의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현행 헌법하에서 행정부와 의회를 지배하는 정당이 서로 다른 분점(分占)정부가 자주 나타났고, 그 때문에 원활한 국정 운영이 어려웠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적어도 다음 두 가지는 지적되어야 한다.

    첫째, 분점 상황은 5년 단임제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제 자체에서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이다. 국민이 대선과 총선이라는 별개의 절차를 통해 행정부와 의회에 서로 다른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대통령제하에서는 분점 상황을 막을 수 있는 완벽한 제도적 장치는 없다. 대선과 총선의 주기를 4년으로 일치시키면 분점 상황이 초래될 가능성을 약간 낮출 수 있다는 것이지 그것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분점 상황은 대통령제에 원죄(原罪)처럼 따라다니는 것이며, 이러한 제도적 허점은 운영의 묘, 즉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적 행위자들의 역량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다.

    둘째, 앞선 세 정부와는 달리 노무현 정부, 특히 2004년 17대 총선 이후의 노무현 정부는 5년 단임제하의 분점 상황을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는 핑곗거리로 쓸 수 없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의 초기 1년은 여소야대의 분점 상황이었고, 노 대통령이 ‘못해 먹겠다’는 말을 하는 것을 이해해 줄 만한 구석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에 힘입어 열린우리당은 의석의 절반을 조금 넘기는 거대 정당으로 도약했다. 비록 지금은 선거법 위반에 따른 잇따른 의석 상실 때문에 절반에 조금 못 미치고 있지만 열린우리당은 여전히 원내 제1당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적어도 2004년 이후만 놓고 본다면 노무현 정부는 앞선 세 민주정부보다도 월등히 유리한 원내 구도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노 정부가 보여준 성과는 정말 보잘것없다. 성장, 분배, 외교, 북한문제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다. 이러한 실패를 분점 상황 탓으로 돌릴 수 없자 노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들고 나온 것이 5년 단임제 탓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것도 적실성 있는 핑곗거리는 아닌 것 같다. 같은 5년 단임을 해도 언행과 성과면에서 ‘준비된 대통령’과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5년 단임제와 분점 상황에서 오는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는 궁극적 해결책은 제도보다는 사람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가 지닌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국가 발전에서 헌법을 위시한 제도 개선이 지니는 중요성은 매우 크다. 그러나 ‘제도(개선)만능주의’는 위험하며, 역시 그 속에서 활동하는 행위자, 특히 지도자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강조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지금처럼 노 대통령과 진보 진영이 자신들의 실패를 덮을 구실을 제도에서 발견하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현 정부의 실패는 명백히 사람의 실패이며, 지난 4년을 돌아보면서 4년 연임이 아니라 5년 단임인 제도(헌법)에 감사하는 사람이 다수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