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진곤 주필이 쓴 '혁명 콤플렉스를 떨치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령 선거가 1년 안쪽으로 다가왔다. (아마) 헌정사상 가장 호기롭게 출범했던 ‘노무현호’도 닻 내릴 준비를 해야 할 때에 이르렀다. 항해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느낌이 시키는 대로 말하자면 겨우 난파는 면했으나 험한 풍파에 이리 찢기고 저리 뜯긴 채 마치 긴급피난이나 하듯 귀항하는 모습이다.

    온통 세상을 다 바꿔놓을 것같이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갔는가. 노 대통령이 강조해 마지않던 ‘시민혁명’으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노 대통령의 대선 경쟁자 가운데 한 사람,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의 대선 후보적 말투로 물어보자.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 지금은 다들 행복해졌습니까?

    노 대통령·참여정부·열린우리당이 고단하고 민망한 임기 말을 맞게 된 까닭을 ‘자기 과신, 집요한 복수심과 과도한 의욕’으로 무리하게나마 정리해볼 수 있겠다. 단편적 주관적인 시각이고 판단이지만 차기 주자들이 명념해줬으면 해서 굳이 하는 말이다.

    다음 정부를 이끄는 사람은 제발 혁명을 꿈꾸지 말기를…. 혁명의 시대가 아닌데도 혁명의 유혹에 휘둘린 게 노 대통령 리더십의 실패 요인이 됐다. ‘과도한 의욕’이란 게 그것이다. 그 추동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득권 세력에 대한 ‘복수심’이었고 그 바탕에는 2002년의 극적인 대선 승리로 한껏 부풀었던 개혁세력의 자신감이 있었다.

    하긴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개혁을 말하면서 혁명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유난히 혁명을 좋아한 이는 역시 노 대통령이었다. 그는 지난 6월 인터넷 포털 사이트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다시 혁명을 말했다. “나는 성격적으로 혁명을 좋아하는 편이다.”

    대선 승리 1주년 기념행사 때 ‘시민혁명’을 강조한 것으로, 또 2004년 12월 프랑스 방문 때 그 나라 지도자들에게 보낸 혁명 찬사로 그의 ‘혁명 지향성’은 이미 호가 났다. 특히 파리의 우리 교민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그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인류가 발명한 역사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게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혁명이다.” “인간이 부닥쳐 있는 문제 중에 인간이 인간을 지배 복종 수탈하는 관계가 가장 큰 문제인데,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우고 성공한 혁명이었다.”

    자신의 이념적 정당성을 스스로 확인하고 남에게 과시할 근거를 프랑스 혁명에서 발견했다고 여겼을까? 어쨌든 프랑스 혁명에 대한 노 대통령의 언급은 그 때나 지금이나 옳다. 그러나 이는 일면의 진실일 뿐이다. 혁명이란 그렇게 분명하게 선(善)만을 향해서 단 하나의 흐름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는 데다 명(明)과 암(暗), 정의와 불의가 함께 뒤섞여서 전개된다.

    장 폴 마라는 죽은 후 혁명 지지자들에 의해 성인으로 떠받들리기까지 했으나 시골의 한 여인 샤를로트 코르데이에게는 피에 굶주린 학살 선동자일 뿐이었다. 그녀는 조국의 평화를 위해 마라를 죽였노라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한 때 자코뱅의 가장 유력한 지도자였던 조르주 당통까지도 피에 질려 외쳤다. “혁명은 이제 제 자식들을 잡아먹고 있다. 친구들이여, 혁명은 결코 장미향수만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은 혁명을 시도할 시대가 아니다. 개혁(改革)까지도 과격성이란 전투복으로 무장한 인상을 주고 있다. 적을 만들어내고 그들에 대한 대중의 복수심을 자극하는 방법이 동원되기 십상인 혁명이나 개혁은 선진국을 지향한다는 우리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 된다. 그러므로 차기 정부를 책임질 주자들은 혁명 혹은 개혁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개선 개량을 말해주기 바란다. 국민의 반걸음쯤만 앞에 서서 걸어가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약해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