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1일자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정치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그가 정치적 행위를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에도 그는 병실이나 응접실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무대를 보다 넓은 강연장으로 옮겼다. ‘병실 정치’나 ‘응접실 정치’가 대북 송금이나 국정원 불법도청이 자신과 무관함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면, ‘강연 정치’는 북한의 핵실험으로 위기에 빠진 ‘햇볕정책’을 살려내기 위한 국내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어 보인다. 그는 퇴임 후에도 참으로 ‘감추거나 지켜야 할 것’이 많은 분주한 전직(前職)이다.

    햇볕정책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그것이 DJ 개인의 소신이라면 어쩌겠는가. 다만 그것을 살리겠다고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행위는 전직이 취할 바른 태도는 아닌 것 같다. 한국이 직면한 핵심 정치과제는 남북문제와 남남갈등의 해결이며, 남남갈등의 주요 내용은 이념 및 지역갈등이다. 그런데 남북문제를 해결하자고, 보다 정확히는 햇볕정책을 살리자고 지역주의에 기대려는 행위는 용납되기 어렵다. 더구나 햇볕정책은 또 다른 국내 갈등인 이념갈등을 증폭시키는 주 메뉴 아닌가.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다양하다. 하지만 단적으로 표현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국적 민주주의’는 이해해도 김정일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보수이고, 그 역(逆)이 진보이다. 이것을 국내정치 차원으로 가져오면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는 이해해도 DJ의 햇볕정책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보수이고, 그 역이 진보라 할 수 있다. 결국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박정희, 김대중, 김정일이란 세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수·진보를 가르는 상징적 기준이 되는 한 사람(박정희)은 이미 죽었고, 다른 사람(김정일)은 우리의 영향권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변수(變數)가 아닌 상수(常數)이다. 이 점에서 여전히 ‘실존’하는 정치인이자 유일한 변수인 DJ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가 박정희와 김정일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세 축 사이의 거리가 좁아질 수도, 넓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DJ가 지금까지 보여준 태도는 실망스러운 점이 더 많다. 그가 햇볕정책의 기조 위에서 김정일을 이해하고 포용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본인의 소신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동일한 이해심과 포용력을 어째서 박정희에 대해서는 보여주지 못하는 것일까.

    “박 대통령이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선건설 후통일’의 2단계 통일노선 위에서 경제발전을 이룩해 놓았기에 오늘날 남한이 북한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햇볕정책은 이런 박 대통령의 성과 위에서 추진되는 것이다. 햇볕정책은 ‘선공존 후통일’의 2단계 통일노선으로서, 내용은 다르지만 적어도 논리 면에서는 박 대통령의 2단계 통일론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왜 DJ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햇볕정책에 대한 보수의 이해를 구하고 진보에게도 보수와의 접점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지 못하는 것일까. 국민들이 전직 대통령에게서 진정으로 듣고 싶은 말은 이런 갈등 치유적인 언사인데.

    햇볕론자들은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을 주장한다. 북한을 자본주의나 남한의 기준이 아니라 북한의 잣대로 보자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접근법이지만, 만약 그것을 인정한다면 어째서 햇볕론자들은 남한의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는 동일한 접근법을 적용하려 들지 않는지 궁금해진다. 이 접근법에 따라 박정희 시대가 산업화 초기 단계이고 남한이 북한보다 열세였음을 인정한다면 박정희의 ‘선성장 후분배’나 ‘선건설 후통일’론이 이해될 수 있고, 그렇다면 DJ는 김정일 못지않게 박정희도 쉽게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