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에 자유주의연대 대표인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가 쓴 시론 '간첩 사건, 단호하게 그러나 오버말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김정일 장군님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시겠다는 ‘일심회’ 사건이 북한의 핵실험으로 뒤숭숭해진 국민들의 마음을 더욱 착잡하게 만들고 있다. 전·현직 간부들이 구속된 민노당은 이 사건이 노무현 정권의 신공안 정국 조성을 위한 정치적 음모라고 반발하고 있으나, 이는 간첩 혐의자에게 국가보상금을 안겨준 현 정부의 ‘진보성’을 너무 폄훼하는 언동이다. 오히려 수사를 독려해 왔던 김승규 국정원장의 갑작스러운 사의표명과 청와대의 수용방침은 과연 수사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이번 사건은 한국사회에 참으로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단순한 반미와 자주를 넘어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과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을 입에 달고 다니고 조선노동당 입당을 영광으로 여기던 1980년대 NL주사파 운동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맹활약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도대체 한국의 21세기가 무엇이고 진보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던져 준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21세기 진보는 시대착오와 동의어가 돼 가고 있다. 선진국 좌파들이 일제히 비판하고 규탄하는 김정일 정권을 싸고돌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충복이 되기를 자원했으니, 이제 한국의 진보는 국제 좌파들의 조롱거리 신세로 전락할 처지다.

    이는 비단 진보만의 위기가 아니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과 현 단계 민주주의의 본질적 실체와도 연결되는 문제다. 이제 한국사회는 자유민주주의와 김일성주의를 신봉하는 인민민주주의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이 둘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함께 묶기에는 너무도 이질적이다. 물론 ‘군홧발 정치’에 대한 소박하고도 순수한 반발심이 이후 진행과정에서 ‘위수김동’으로 변하는 등 그 경계선이 모호한 것은 사실이나, 적어도 개념적 차별성을 명확히 해 체제전복을 획책한 남민전 등을 민주화운동으로 미화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이 길만이 ‘쓰레기 더미 위에서 장미꽃을 피운’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욕되게 하지 않는 유일한 해법이다. 인민민주주의를 민주주의라는 그릇 속에 버무리는 것은 ‘80년 광주’에 대한 모멸 행위라는 사회적 자각이 절실히 요청된다.

    누구보다도 현 정부가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현 정부가 표방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한 계보임을 보여주려면, 평양 연계 세력과 명확한 선을 그어야 한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진보라는 이름으로 함께 어울리다 보니 체제수호세력을 자극해 때 아닌 국가정체성 논란을 일으키고 있음을 깨닫길 바란다.

    민노당도 솔직해져야 한다. 21세기 한국정치의 최대 코미디는 민노당을 진보정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NL주사파가 최대주주인 민노당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동(反動)정당일 뿐이다. 진정 좌파를 하고 싶다면 김정일의 똘마니를 자임할 것이 아니라 서구형 좌파정당으로 환골탈태할 준비를 해야 한다.

    한나라당과 재야우파에게도 ‘잔소리’ 한마디 해야겠다. 절대 오버하지 말라. 특히 과거의 공안통들이 앞장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무분별한 ‘빨갱이 타령’은 역풍을 초래해 ‘조심스럽게’ 부활하고 있는 공안기능에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사태를 초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파의 이적행위자’로 규탄받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국정원은 심하게 변질됐다. 간첩 잡기를 포기한 정보기관은 국민의 세금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런데 그 죽었던 기능이 기적같이 되살아나고 있다. 자리 유지에 연연하지 않고 국가의 핵심기능을 부활시킨 김승규 원장, 역사는 그를 의인(義人)으로 기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