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가 폄하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에 넘겨준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는 것이 주권국가의 꽃이라고 호기 있게 말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역사를 잘못 알고 있다. 이승만 박사는 가장 외세를 잘 이용한 자주적 대통령이었다. 작전통제권을 넘겨주면서 실제로 안보적 반대급부를 가장 많이 얻어냈다. 작전통제권을 넘겨주었다지만 이 박사는 국가이익이 걸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반공포로를 자의로 석방했다. 정전 협정을 반대하여 한국군 대표 파견을 거부하면서 결국 미국이 체결을 주저했던 한미방위조약을 얻어냈다.

    이에 비하여 노 대통령은 구상유취(口尙乳臭)다. 말로만 ‘자주’를 떠벌리고, 할 말은 한다지만 실속은 없다. 이라크에 파병했고, 한미FTA를 추진하면서도 받은 게 별로 없다. 그래서 어느 여당의 중진은 노 대통령은 우회전을 하면서 공연히 좌회전 신호를 켜고 있어서 교통만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고 혹평하고 있다.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판단 근거에는 두 가지 가설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북한은 현재와 같은 파산 직전의 경제로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다는 가설이고, 또 하나는 미군은 자국의 이익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등을 밀어도 절대로 한국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가설이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잘못된 가정이다.

    전쟁에서는 주도권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선제공격의 주도권은 북측이 갖고 있다. 우리의 방위전략은 공격을 당하고 나서야 반격하는 개념으로 형성되었다. 현재 북측은 미사일과 장사정포로 언제든 우리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막강한 보복능력이 있어야 한반도의 안보상황은 균형 유지가 가능하다. 그 억제력을 한미연합방위체제가 확고하게 강화해 왔다. 만약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 안보체제에 들어가면 북측은 대뜸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전쟁을 오래 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전쟁의 주도권을 갖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정치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 북측이 끈질기게 한미연합방위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 미군은 동북아에 걸린 미국의 이익 때문에 한국에 남을 것이란 전제도 오산이다. 한미연합작전 능력이 약화된다면 동북아에서의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일본의 종속적 개념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한반도의 확고한 평화체제가 이룩될 때까지 한미동맹이 강화되어야 노 대통령이 말하는 균형자 역할도 가능하다.

    그러함에도 노 대통령이 작전통제권을 환수하겠다고 고집함으로써 한반도는 새로운 안보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안보가 위태롭기 시작하는 시점은 노 정권이 끝난 후인 2009~2012년 사이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 정권을 준비한다는 정치권에서는 가타부타 말을 아끼고 있다. 여당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1야당인 한나라당도 명확한 방침이 없다. 오히려 젊은이들이 열망하는 ‘자주’란 말에 걸려 허우적거리고 있다. 언필칭 대권주자들도 이상스럽게 몸을 사리고 있다. 바로 다음 대통령 임기 내에 당할 안보위기인데, 혹시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서 침묵을 지키다니 한심스럽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행정수도 이전’론으로 재미 보듯이, 또 수많은 촛불시위로 국민을 홀리듯이, 앞으로도 노 대통령은 계속하여 이상스런 주술(呪術)과 같은 말장난으로 정국을 주도하며 국민을 헛갈리게 할 것이다. 거기에 정치인들은 지지표 계산에만 몰두하다가 헛물켜고 말 것이다. 그 틈에 멍드는 것은 한국의 안보뿐이다. 그러니 이를 어찌하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로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