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ㅏ        나의 삶, 나의 길

                                박 범 진 / 미래정책연구소 이사장/14-15대 국회의원

  • 박범진 국회의원 시절.
    ▲ 박범진 국회의원 시절.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은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나에게
    일찌감치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순진한 소년이었던 나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인간의 삶이 던지는 갖가지 의문에 접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6.25전쟁 중 아버지가 월북한 것은
    큰 충격이고 의문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나온 아버지는
    일제 때 경찰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 경위가 되어 청주와 보은 등지에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에
    갑자기 경찰생활을 그만두었었다.
    생전에 어머니가 들려준 얘기에 의하면
    일제 때부터 독립운동을 하던 좌파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던 아버지가 해방 후에도
    관계를 유지하다 결국 경찰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것이다.

    가족을 남기고 소리없이 월북한 아버지

     갑자기 경찰생활을 그만둔 아버지는 보은에서 대전으로 우리 가족을 데리고 이사하여
    대전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차리고 가족을 부양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왜 갑자기 경찰생활을 그만두었는지 전혀 몰랐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대전 부근 농촌에 있는 고모 집에 맡기고
    자신이 경찰생활을 했던 보은으로 떠났다. 그것이 아버지와 마지막이었다.
    전세가 역전되어 낙동강까지 밀려갔던 국군과 유엔군이 북상해오자 아버지는
    보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 나중에 우리 가족에게 전해진 소식이었다.

     당시 30세였던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대전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제천 외가로
    우리 3남매를 데리고 갔다. 대전에서 제천까지 꼬박 1주일을 걸어서 갔다.
    7살 짜리 여동생은 걸어서,2살 짜리 남동생은 어머니가 등에 업고 갔다. 외할머니는 결혼한지
     10여년만에 형편없는 몰골로 불쑥 나타난 어머니를 붙잡고 이게 무슨 날벼락이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 6.25남침 북한군들이 남한을 공격하는 모습.
    ▲ 6.25남침 북한군들이 남한을 공격하는 모습.
 중공군의 개입으로 이듬해 1월 전선이 남쪽으로 밀리면서 다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하게
되자 외삼촌 식구들과 함께 피난길에 나서 수안보에서 외삼촌 식구들과 헤어졌다. 방위군 제천지역 책임자였던 외삼촌 식구는 상주로 향하고, 우리는 혹시 아버지가 돌아올지 모른다고 여겨
보은으로 향했다.
 우리가 보은과 인접한 상주군 화북면 어느 마을에 이르렀던 어느날 태백산맥을 거쳐 지리산으로 향하던 북한 게릴라 부대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가 머물던 마을을 비롯해 인근 몇 개 마을을 점령했다. 게릴라 부대는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마을 주민들이 바깥 지역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 우리는  약  한달 동안 그들 점령지역에 갇혀 있어야 했다.
나중에 6.25전사를 읽어 본 결과 그 게릴라 부대는 그 유명한 이현상 부대였다.

 이현상 부대에 갇혀 있는 동안 어머니는 이 부대에 혹시 아버지지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게릴라 부대 본부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게릴라 부대 본부를 찾아갔다가 아버지 소식은 전혀 확인해 보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간첩혐의를 받아 이틀 동안 감금을 당한채 엄중한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어머니 목에 권총을 들이대고 찾아온 목적을 실토하라고 욱박질렀다.
어머니를 따라갔던 나도 다른 방에 끌려가 심문을 당했다. 어머니는 이틀만에 풀려났지만 가지고 있던 현금과 도민증을 그들에게 모두 빼앗겼다. 돈을 몽땅 빼앗긴 우리는 식량을 살 수 있는 돈이 한푼도 없어 몇 달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머니와 내가 매끼 바가지를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구걸하며 살아야 했다.

북한 게릴라 부대에 시달리고 국군 총알에 다리 맞아

 게릴라 부대에 갇혀 있던 어느날 마을로 진격해 온 국군부대가 마을을 향해 쏜 총에 나는 오른 쪽 다리를 맞아 총상을 입었다. 다행이 다리를 관통하지 않아 중상을 면했지만 병원과 약국이 없는 깊은 산골 마을이어서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어 어머니가 매일 아침 입으로 고름을 빨아 고쳐 주었다.
 게릴라 부대가 점령지역을 떠나고 총상을 입은 나의 다리가 다 나은 뒤 우리는 보은으로 다시 향했다. 보은군 산외면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식생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게릴라 토벌 국군부대 밥을 지어 주면서 밥을 얻어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토벌부대는 이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장교로 근무했던 화랑사단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어느날 밤 국국 사병 4,5명이 우리 가족이 묵고 있는 집에 들이닥쳐 어머니를 집단강간하려 한 것이다. 어머니는 집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안방으로 황급히 도망쳐 할아버지 할머니 뒤에 몸을 숨기고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호통쳐 병사들을 쫓아버려 어머니는 간신히 변을 면했다. 내가 어렸을 때 겪은 이 충격적인 사건은 나중에 내가 젊은 시절 좌파로 기울게 된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오산까지 밀려갔던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이 북상하자 어머니는 보은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고 우리 3남매를 데리고 다시 제천 외가로 갔다 이번에도 1주일을 걸어서 갔다. 일단 다시 외가를 찾아갔지만 공무원 생활을 하던 외삼촌에게
기약없이 의탁해서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대전에 남겨두고 온 구멍가게를 팔아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대전을 찾아갔다. 어머니는 크게 낙망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 오래 동안 우리 가족 소식이 끊기자 생활이 어려웠던 친할머니가 우리 구멍가게를 팔아 썼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를 도우려 구두닦이를 했다.

나는 구두닦이, 어머니는 행상 나서

 우리의 딱한 사정을 안 어머니 고종 사촌 동생이 그래도 시골이 살기 나을 것이라며 권유하여
제천시에서 14,5 킬로미터 떨어진 청풍이란 곳으로 어머니는 우리의 거처를 옮겼다.
청풍은 천관우 전 동아일보 주필과 이춘구 전 신한국당 대표가 초등학교를 나온 곳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곧 비누 치약 빗 머리핀 등 간단한 생활용품을 머리에 이고 마을마다 다니며 파는 행상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장사를 끝내고 돌아올 때는 내가  어머니가 있는 마을로 가서 물품 대금으로 받은 콩이며, 팥이며 양곡들을 지게에 지고 왔다. 그 때는 시골 사람들이 물품 대금을 현금 대신 대개 양곡으로 주어 연약한 어머니가  혼자 무거운 양곡을 이고 올 수 없었다.
 그 곳에서 나와 여동생은 전쟁으로 학교를 그만둔지 2년만에 뒤늦게 초등학교를 다시 다니게 되었다. 초등학교는 면 소재지에서도 한참 떨어진 조그마한 학교로 내 동기생은 남학생 15명,여학생 9명 등 고작 24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다시 공부를 하게 된 것이 너무 기뻐 열심히 공부를 했다.
 우리 가족은 그 곳에서 4년을 지낸 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그 곳을 떠나 제천 시내로 나왔다. 내가 면 소재지 청풍중학교 1학년 때 청주에서 있었던 중학교 학력경시대회에 참가해
충북에서 1등을 한 일은 나로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제천중학교로 전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하마터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뻔했다.행상을 하며 얼마간 돈이 모이자 어머니는 농촌에서 콩 팥 고추 등을 사서 서울 도매상에 넘기는 중간상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서 돌아오던 어느날 어머니는 기차 안에서 깡패들에게 걸려 판매
대금으로 받은 돈을 몽땅 빼앗겨 알거지가 되었다. 어머니는 하도 기가막혀 며칠 밤을 자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그러더니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이제 함께 살 수 없으니 어린 남동생은 고아원에 보내고 여동생은 남의 집 식모로 보내 놓고 나와 어머니는 헤어져서 알아서 살자는 것이었다.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제천 중학교 수석 졸업...서울 경복 고등학교 수석 합격

 나는 서울 경복고에 다니는 외사촌 형이 입학지원원서를 보내주어 서울에 와서 시험을 보아 놓고도 그 결과를 알아 볼 생각도 못하고 그냥 집에 드러누워 앞날을 고민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졸업한 제천중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왜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수석 합격을 하고도 학교에 가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경복고는 본교 중학교 출신 중에서 7개 반을 뽑고 나머지 1개 반은 타교 출신 중에서 별도 시험을 거쳐 뽑아 내가 타교 출신 시험에서 수석합격을 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당연히 서울의 고교에 진학한 줄 알았던 중학교는 내 형편을 알아보더니 난감해했다. 수석 졸업생이 고교 진학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한번 서울에 올라가 보라는 학교의 권유에 따라 입학식이 끝난지 열흘 쯤 지나 서울로 올라와 경복고를 찾아갔다.

 학교측의 안내로 교장실로 들어서자 교장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 주면서 왜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했느냐고 물었다.그러더니 캐비넷을 열어 교복 한 벌과 교모와 가방을 선물로 주었다. 경복고는 입학식에서 본교 수석 합격자와 타교 수석 합격자에게 교복과 교모와 가방을 선물로 주고 축하해 주는 관행이 있었으나 내가 입학식에 불참해 내게 줄 선물은 교장실 캐비넷 속에 넣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의 교장 선생님은 맹형규 전 국회의원의 할아버지인 맹주천 선생이셨다.
 
 입학시험에서 수석합격을 한 덕분에 나는 고교 3년간 수업료 면제 혜택을 받았다. 거기에다 고교 3년과 대학 4년간 전액 장학금을 주는 ‘학원’장학생으로 선발되는 행운을 얻어 고교 진학을 포기하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교 3년간 수업료 면제 혜택과 고교에서 대학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으나 아무런 연고자가 없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에는 난관이 적지않았다.당장 숙식을 해결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어떻게 아는 집을 찾아 숙식을 해결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학교에 다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단임 선생님은 내가 수석 합격을 했다고 해서 나를 반장을 시켰으나 나는 1주일도 못되어 도저히 학교에 다닐 수 없어 시골로 내려가야겠다고 했다. 당혹해하신 담임 선생님은 좀 기다려 보라 하시더니 교무실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상의를 하셨다. 그러더니 방과 후에 화학을 가르치시던 어느 선생님을 찾아가 보라고 하셨다. 방과 후 그 선생님을 찾아가자 그 선생님은 대뜸 “너,있을 데가 없어? 우리 집에 가자”하시는 것이었다.
 그날로 나는 선생님을 따라 선생님 댁으로 갔다. 선생님 댁은 열 두서너 평 정도의 아주 작고 허름한 집이었다. 20대 말의 사모님은 세 자녀를 키우면서 삯 바느질을 하며 선생님 생계를 돕고 계셨다. 약 한달 동안 선생님 댁에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선생님 사모님이 싸주시는 도시락을 가지고 매일 아침 선생님과 함께 걸어서 등교를 했다.
 선생님 댁에 머문지 한달 쯤 되었을 때 선생님은 “내일부터는 마포에 가서 학교에 다녀.내 누님 댁이야.중3 짜리가 있으니 그녀석 좀 봐주면서 학교에 다녀.”하셨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입주 가정교사로 고교 3년과 대학 4년을 마칠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쩌면 고교를 다닐 수 없었을는지 모른다.

잊을 수 없는 선생님들 

 그래서 국회의원이 되어 교총 신문에 칼럼을 쓸 기회가 있었을 때 “나의 위대한 스승”이란 제목의 글을 쓴 일이 있다. 부인과 사전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자를 불쑥 집에 데려가 지내도록 하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평생 그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해 고교를 졸업하고 약 40년간 선생님이 작고하실 때까지 1년에 한두 차례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선생님을 찾아 뵈올 때마다 선생님은 사모님께 소주상을 차리게 해 나와 술잔을 기울이며 즐거워하셨다. 선생님이 작고 하신 뒤에도 나는 종종 사모님을 찾아 뵙고 있고 찾아 뵙지 못하면 전화로 문안을 여쭙고 있다.

 나는 원래 대학은 이공계를 택하려고 했으나 대학입시를 앞두고 눈 검사를 한 결과 적록색약임이 밝혀져 부득이 문과로 진학했다.당초 고3에 올라가면서 법대 진학을 염두에 두고 문과반을 택했으나 여름방학 때 어머니가 계신 제천으로 내려갔더니 대학은 어딜 가려고 하느냐고 물으셨다. 법대를 가려 한다고 하자 어머니는 법대는 절대로 안된다고 펄쩍 뛰셨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정치에 휘말려 경찰에서 쫓겨나고 6.25때는 월북까지 하는 걸 보고 나는 절대로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고 의사나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고 어머니는 고집했다. 
 어머니의 고집이 워낙 완강해 여름방학이 끝난 뒤 서울에 올라와 2학기부터는 이과반으로 반을 옮겼다. 내가 보기에도 나는 문과보다 이과가 적성이었다. 수학과 물리가 제일 쉽고 국어가 제일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과반으로 옮겨 이과 공부를 하고 눈 때문에 이공계로 진학하지 못한 것은 나의 팔자소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 4.19때 부정선가 규탄 메도하는 대학생들. '민주주의 사수하자' 플래카드 구호가 한자로 쓰여있다.
    ▲ 4.19때 부정선가 규탄 메도하는 대학생들. '민주주의 사수하자' 플래카드 구호가 한자로 쓰여있다.
  •  나의 대학생활 4년은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1960년에는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학생혁명이 있었다.
    2학년 때 1961년에는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대학 시절 두 차례 혁명을 겪은 세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두 차례 혁명을 겪은 뒤끝이라 대학은 4년 내내 술렁이었다.

    4.19  데모...민통학련과 신진회 가입

     4.19학생혁명 이후에는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우선 서울대에서는 제일 먼저 ‘민족통일 서울대 학생연맹’이 결성되었고 정치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신진회’라는 써클도 만들어졌다. 나는 이 두 조직에 모두 가입하여 선배들의 활동을 지켜봤다.
    민족통일 서울대 학생연맹 초기 의장은 윤식(전 국회의원)이었고, 후기 의장은 자유당 정권 때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복학한 류근일(전 조선일보 주필)이었다.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신진회는 유세희(전 한양대 부총장), 윤식, 이수정(전 문화부 장관), 이영일(전 국회의원) 등 정치학과 3학년생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 두 조직의 핵심 인물들은 5.16군사혁명 후 모두 구속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나는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신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많은 지적 자극을 받았다.
    일요일마다 빈 강의실에서 모임을 갖고 토론을 벌일 때는 좌우파간의 논쟁이 격렬했다.
    좌파는 공산주의, 우파는 사회민주주의였다. 나에게는 격렬하게 벌이는 논쟁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월북으로 어렸을 때부터 공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나는 사회주의에 관한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구해 읽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레닌의 ‘제국주의론’과 ‘국가와 혁명’,마오쩌둥의 ‘모순론’과 ‘실천론’ 등은 말할 것도 없고 그밖에 많은 번역서들을 읽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6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 독리국가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비동맹운동이 세계의 주목을 받던 시기여서 우리도 어떤 체제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대학생들의 관심이 컸었다.
    1959년 성공한 쿠바혁명을 소재로 쓴 C.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여!”라는 책은 대학생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민족통일 서울대 학생연맹과 신진회는 5.16군사혁명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나의 대학생활 마지막 해인 4학년이 되었읊 때 어느날 동기생인 이종율(전 국회의원)이 신진회와 같은 토론 써클을 만들어 놓고 졸업하자고 제의했다. 내가 선뜻 그 제의를 받아들여 우리는 바로 ‘민족주의비교연구회’라는 써클을 만들었다. 회장에 이종율, 연구부장에 김경재(전 국회의원), 나는 총무를 맡았다. 지도 교수로는 사회학과의 황성모 교수를 모셨다.

    이 써클 때문에 대학을 졸업한 3년 후인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엮여 이종율과 내가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지도 교수였던 황성모 교수가 서독 유학 시절 북한 공작원에 포섭된 간첩으로 그의 지령으로 써클을 만들었으니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재판 결과 황 교수의 간첩혐의가 무죄가 되어 우리도 모두 무죄선고를 받고 나는 6개월만에, 이종율은 1년만에 풀려났다. 

    씻을 수 없는 과오...인혁당 가입, 북한산서 선서

     나는 4학년 초에 평생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지하혁명당인 ‘인민혁명당’에 가입한 것이다. 당시 남북한을 비교해 봤을 때 북한은 남한보다 잘 사는 우월한 체제로 북한의 김일성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무장투쟁을 한 독립운동가인 반면에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에 협력한 친일 장교였다는 점에서 남북통일은 북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친구로부터 혁명정당이 태동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흔쾌히 인민혁명당에 가입했다.

     지금은 상세히 기억못하고 있지만 등사용지에 깨알같이 쓰인 당 강령은 남한에 민족자주 정권을 수립하여 북한과 협상을 통해 평화통일을 이루자는 것이었던 같다. 입당은 북한산에 올라가  친구 앞에서 오른 손을 들고 선서를 하는 형식으로 입당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산주의의 종말을 내다보지 못한 어리석고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인민혁명당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데모가 격화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학생데모 배후세력을 수사하던 중앙정보부에 의해 적발되었다.
    중정은 당초 이 사건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으나 사건 당사자들이 검찰 조사에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주장하여 검찰은 할 수 없이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그 바람에 사건 당사자 일부만이 1년 내지 2년 정도의 가벼운 처벌로 끝나고 말았다.
    조직의 말단에 속했던 나는 공소보류로 기소대상에 들어가지 않았다.

    '조작' 논란 두고 볼수 없어...세미나서 폭로

     이 인혁당 사건은 유신시절인 1974년 ‘제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함께 끊임없이 조작논란에 휩싸여 왔으나 조작사건이 아니라 실재했던 지하당이었다. 사건의 당사자로서 끊임없이 조작논란이 이어져 오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당사자들이 많아 입을 열기 어려웠다.
    국회의원이 되어 공적 활동을 하면서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이 국민들에게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가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던 차에 2010년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주최로 “박정희 정권과 학생운동”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이 주제 발표를 하고 나는 토론자로 참여했다.
    그 세미나에서 나는 인혁당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 아니라 실재했던 지하혁명당이며, 다만 중앙정보부(현 안기부)가 물증을 확보하지 못해 객관화하는 데 실패했을뿐이라고 밝혔다.
    그 뒤 세미나 내용이 출판되자 나의 증언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 인혁당에 입당했던 필자가 세미나에서 밝힌 내용을 보도한 MBC TV화면.
    ▲ 인혁당에 입당했던 필자가 세미나에서 밝힌 내용을 보도한 MBC TV화면.
  •  나는 대학 졸업 후 바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언론인의 길을 걸었으나 기자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입사한지 한 달이 좀 지나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 데모가 격화되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나는 학생 데모 배후조종 혐의에다 인혁당 문제로 현상 수배 검거 대상이 되어 약 4개월간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계엄령이 해제되고 인혁당 문제도 사건이 축소되는 쪽으로 결말이 나면서 신문사에 복귀했으나 그 뒤 3년 후에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엮여 6개월간 옥살이를 해야했다. 대학 졸업 직전 만들어 놓고 나온 써클 때문이었다.
    재판을 받고 무죄로 석방되었으나 이제는 군대 입대 영장이 나왔다.
     뜨거운 8월 초에 입대한 나는 훈련 도중 혈압이 올라 쓰러질 뻔했다. 군 의무실에서 혈압을 재보더니 훈련을 중지시키고 육군병원으로 나를 보냈다. 입대 당시 29살이었던 나는 육군병원에서 당뇨병 진단을 받고 입대 4개월만에 의병제대했다.
     당뇨병 진단으로 오래동안 나의 건강문제에 대해 품어왔던 의문이 풀렸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교와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리고 신문사에 들어와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까닭없이 자주 느껴왔던  피곤이 당뇨병 때문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청소년 시기부터 나타나는 당뇨병은 인슐린을 분비하는 췌장이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나기 때문에 생기는 당뇨병1형으로 평생 약을 먹거나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다.

    나는 올해로 당뇨병 진단을 받은지 48년이 되었다.처음 14년간은 약을 먹었으나 그 뒤 34년 동안은 인슐린 주사로 건강을 유지해 오고 있다. 당뇨병이 오래되면 합병증이 나타나 15년 전에는 눈의 망막 출혈로 수술을 받았고 3년 전에는 심장 관상동맥 우회로 수술을 받았다. 당뇨병이 오래되긴 했으나 그래도 매주 일요일 등산을 할 정도로 건강이 양호한 편이다.

    조선일보 기자생활중 두 가지 '비밀'

     나는 조선일보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세상에 공개하기 어려웠던 일이 두 차례 있었다.
    하나는 이른바 제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될 뻔한 일이었다.
    유신체제가 선포된지 얼마 안되어 과거 1차 인혁당 사건 때의 선배 당원한테서 연락이 왔다.
    몇몇이 모여 시국에 관해 애기를 나눠 보자는 것이었다. 언론인으로서는 동아일보 심재택 기자가 함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은평구 기자촌 심재택 기자 집에서 첫 모임이 있었다. 그 뒤 전농동 과거 인혁당 당원 집에서 두 번 째 모임을 가졌다. 두번 째 모임까지 참석한 뒤부터는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대화 내용이 점점 위험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모임이 그 후 어디까지 진전되어 갔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 현대사에서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유신체제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군부 쿠데타에 연루될 뻔한 일이었다.하루는 지인으로부터 현재 군부에서 유신체제를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가 준비 중이니 좀 참여해서 도와 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유신체제를 타도하기 위한 군부 쿠데타가 준비 중이라는 얘기는 반가운 일이었으나 내가 여기에 참여하는 일은 너무나 위험하다고 느껴 직접 참여는 거절하고 쿠데타에 성공하면 적극 돕겠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쿠데타 음모는 보안사에 적발되어 실패로 끝난 것으로 전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쿠데타 음모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조용히 제대시키는 것으로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의 조선일보 기자생활은 11년만에 끝났다.
    70년대 들어 유신체제가 선포되면서 정권의 언론탄압이 극심해지자 동아일보 기자들을 선두로 기자들의 언론자유 투쟁이 번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탄압을 하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신문제작 거부농성에 들어갔다. 동아일보는 광고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기자 아나운서 PD 등 121명을 파면하는 것으로 정권에 굴복하고 말았다. 조선일보도 신문제작 거부 농성 사태가 벌어지자 33명의 기자를 파면했다.나도 파면 대상에 포함되었다.
     신문사에서 쫓겨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복직을 요구하는 투쟁을 수십년간 계속해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속한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은 41년째 월례 모임을 갖고 있다.
     
    해직기자들 구심점은 천관우 선생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이 신문사에서 쫓겨난 유신시절 해직기자들의 정신적 구심점은 천관우 전 동아일보 주필이었다. 천관우 선생은 기자들 보다 먼저 정권의 압력으로 신문사를 떠나 민주화 운동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매년 정초 불광동 천 선생 집은 해직기자들로 북적거렸다. 그렇게 북적거리던 천 선생 집이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찾는 해직기자들이 하루 아침에 발길을 뚝 끊어 썰렁해졌다. 천 선생이 민주화 운동에서 손을 떼고 통일원 고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해직기자들은 천 선생이 변절했다고 여긴 것이다.
     해직기자들이 천 선생을 외면했다고 해서 나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천 선생은 나의 제천 고향 선배였기 때문이었다. 천 선생이 통일원의 고문이 되었다고 하루 아침에 해직기자들이 등을 돌린 것은 너무 야박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명절 때마다 나는 변함없이 불광동 천 선생 댁을 찾아뵈었다. 내가 천 선생을 찾아뵈올 때마다 천 선생은 부인에게 술 상을 차리게 했다.나는 천 선생이 따라주는 술을 마시며 왜 민주화 운동을 그만두셨는지 물었다. 천 선생은 광주 유혈사태를 보고 더 이상 재야운동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는 천 선생의 그 말을 듣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 선생은 한번은 나와 술을 마시다 “박 선생,나도 박 선생과 동창이야.”라고 하셨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묻자 “내가 대학시험에 떨어져서 제2고보 보습반을 1년 다녔거든.”이라고 밀씀하셨다. 제2고보는 내가 다닌 경복고등학교의 일제 때 이름으로 당시는 학원이 없어 대학입시 낙방생들이 보습반을 다녔다는 것이다. 천 선생은 제2고보 보습반을 1년 다니고 또 대학입시에 낙방해서 다시 제1고보(현 경기고등학교) 보습반을 거쳐 겨우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했다는 것이다.
    제천 청풍에서 어렸을 때 신동으로 알려졌던 천 선생이 3수 끝에 대학에 들어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 모든 공직을 마치고 '미래정책 연구소'와 탈북자 돕기 활동에 나선 필자.
    ▲ 모든 공직을 마치고 '미래정책 연구소'와 탈북자 돕기 활동에 나선 필자.
  •  나는 언론을 떠난 뒤 약 10년을 중소기업에서 보냈다.
    출판사와 수퍼마켓,전자 손목시계 회사와 두 곳의 주류 회사에서였다. 회사에서의 직급은 차장에서 시작하여 부장 이사 상무까지 지냈다.이렇게 저렇게 회사를 전전하며 보낸 중소기업에서의 생활은 비록 월급은 시원찮았지만 그런대로 생활은 되었다. 나는 장사가 적성에 맞는 듯했다.
     중소기업에서 보낸 10년은 기업경제를 통해 무역 유통 금융 금리 환율 재정 조세 회계 등 경제문제 전반에 걸쳐 경제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지내고 보니 소중한 기간이었다.그리고 서민생활과 노동현장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체험을 갖게 했다. 그러한 귀중한 체험은 나중에 정치를 하는 데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중소기업에서 보낸 10년은 다방면에 걸쳐 체계적으로 기획독서를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두 차레 혁명을 겪으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보낸 대학 때나 바쁜 기자생활을 하며 보낸 언론사 재직시에는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내 일생 동안 중소기업에서 일하면서 책을 제일 많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수백 권은 되었을 것이다. 

    끝없는 검은 손길...이번엔 '난민전'까지

     수퍼마켓에서 일할 무렵 나는 하마터면 인혁당과 같은 사건에 또 다시 휘말릴 뻔했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고 나온 대학 친구가 찾아와 새로운 혁명조직을 함께 만들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인혁당이 실패로 끝난 뒤 다시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게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리고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충고했다. 그 친구는 나를 만나러 세 번이나 찾아 왔으나 나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가 만들자고 제의한 혁명조직은 2년 뒤 중정에 의해 적발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약칭 남민전)이었다. 나는 그를 당국에 고발 할 수는 없었다.

     구로공단에 있는 전자 손목시계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때마다 이사로서 몇 차례 연대보증을 한 것 때문에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나는 거지가 될 뻔했다. 내가 퇴사한 뒤 얼마되지 않아 회사가 부도가 나자 바로 22평 짜리 아파트를  두 군데서 가압류를 하고 집안의 피아노 냉장고 텔레비전 전화기 등에도 압류 딱지를 붙였다. 회사가 부도가 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친구 이름으로 아파트에 가등기를 해두어 다행히 아파트를 빼앗기지 않았다.
     친구 이름으로 가등기를 해두었던 아파트는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 친구 앞으로 본등기를 해 소유권을 옮긴 뒤 바로 팔아 아내 이름으로 새 아파트틀 샀다. 연대보증 때문에 거지가 될 뻔했다가 간신히 거지신세는 면했지만 연대보증에 의한 채무변제 의무를 이행하라는 금융기관의 요구는 내가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나에 대한 빚 독촉은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회사를 새 회사가 인수하면서 15년만에 해결되었다.

     조선일보를 떠나 약 10년을 중소기업에서 보낸 뒤 뜻하지 않게 서울신문 논설위원으로 언론으로 돌아왔다. 과거 조선일보에서 같이 근무했던 이우세 서울신문 사장으로부터 논설위원으로 오지 않겠느냐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조선일보로 돌아가야 머땅하지만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평소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동안 약 10년간 언론계 공백이 있었지만 논설위원으로 감히 갈 생각을 한 것은 중소기업에서 보낸 10년 동안 충분한 독서를 통해 논설위원을 할 정도의 지식은 갖추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별 어려움 없이 논설위원으로 쉽게 적응했다.

    다시 언론인 2년여...여야 당에서 창당 참여 권유

     내가 정치에 몸을 담게 된 것은 1987년 시민혁명으로 민주주의가 회복된 다음해 실시된 13대 총선이 계기가 되었으나 사실은 1981년 11대 총선 때 출마를 할 뻔했다. 11대 총선을 앞두고 신당 창당을 하고 있던 민정당과 민한당, 두 당에서 참여를 권유해 왔기 때문이었다.
    민정당 쪽에서는 이재형 전 민정당 대표위원과 허문도 전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 연락을 해 왔고, 민한당 쪽에서는 언론계 선배인 손세일 전 의원이 연락을 해 왔다.
     당시 백화양조 이사였던 나는 이재형 전 대표위원의 연락을 받고 네 차례 사직동 이 대표위원 댁을 방문,많은 얘기를 나누었으나 정태기 조선일보 해직기자 대표가 보안사의 수배대상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여당을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야당을 하기로 결심하고 민한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겠다고 손 전 의원에게 통보했다.그러나 창당 발기인 대회 전날 밤 창당 발기인 명단에서 내가 제외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5.17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새로 신당 창당을 허용하면서 1,2,3당에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인물들을 배치하기 위해 각당의 창당 발기인 선정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1당 배치 대상으로 2당 배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두 당으로부터 참여 권유를 받고도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11대 총선 때 출마를 할 뻔했다가 못하게 된 이후로는 정치를 해 보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으나 정치에 몸담을 기회가 다시 온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2년 한 뒤 편집부국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13대 총선을 앞두고 언론계 선배인 심명보 민정당 사무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민정당 후보로 서울에서 출마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뜻밖의 제안이라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상의했다. 아내는 강력히 반대했다. 아내는 정치에 대해 혐오감이 대단했다.아내가 반대한다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틀 뒤 아내는 내가 하고 싶다면 해도 좋다고 한 발 물러섰다. 내가 조선일보를 떠나 10년간 중소기업을 전전햇던 모습을 지켜 본 아내는 나의 새로운 앞길을 막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내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도전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심명보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출마 결심을 전했다.

    첫 출마에 실패...정치 위선극 실감

     나는 13대 총선에서 서울 양천갑구에 출마해 1등과 3천 표 차이로 3등을 하였다.
    참담한 실패였다. 무엇보다 아무런 사전준비 없이 선거에 뛰어든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엇다.
    선거에 즈음하여 단 1천만원도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당에서 충분히 뒷받침할테니 돈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만 순진하게 믿은 것이 불찰이었다. 당시에는 선거운동원에게 돈을 주지 않으면 나의 선거벽보도 붙여 주지 않았고 현수막도 걸어 주지 않았다.
     당은 선거 중반전이 지나도록 선거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지구당 간부들은 “돈도 없으면서 여기는 왜 왔느냐?”고 불평들을 했다. 당은 선거 종반전에 이르러서야 선거자금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너무 늦어 선거자금을 실효성있게 쓸 수 없었다.

     나는 대학 1학년 때 4.19학생혁명에 참여했던 감격을 오래 동안 지녀 왔으나 내가 직접 선거에 뛰어들면서 부끄럽기짝이 없는 짓을 했다. 표를 얻기 위해 저소득층에게 쌀표를 돌리고 집집마다 타월을 돌렸다. 당원들에게는 활동비라는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뿌렸다. 나는 처음에 그건 안된다고 반대했으나 지구당 간부들은 여당은 원래 그렇게 선거를 해왔다는 것이었다. 불법 선물을 돌리고도 낙선한 뒤 나는 선물을 돌리는 것이 득표와는 별 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 다음부터는 일절 선물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4년 재수 끝에 14대 총선에서는 차점자와 상당한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이 민주자유당으로 합당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국회의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정치를 하게 되면서 바로 정치의 위선을 맛보았다.
    그것은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민자당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서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자기 후임을 뽑는  대통령 선거에 나설 대통령 선거 후보는 민주적인 당내 자유경선을 통해 선출하겠다고 수 차례 공언을 했었다.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3당 합당에 참여한 김영삼 전 통일민주당 총재에 맞서 박태준 최고위원이 민정계를 대표하여 경선 후보로 나서려 하자 노태우 대통령은 그를 주저앉혔다. 박태준 최고위원이 경선에 나선다면 탈당을 하겠다고 김영삼 후보가 위협을 했기 때문이다.
    박태준 최고위원 대신 이종찬 전 원내총무가 민정계를 대표하는 단일후보가 되면서 그의 지지율이 김영삼 후보보다 올라가자  이 후보를 지지하는 의원들에게 압력을 가해 하나 둘 씩 이탈을 시켰다. 이를 보다 못한 이 후보가 경선 거부선언을 해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은 결국 파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경선이 진행되는 동안 이종찬 경선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아 그를 도왔다. 이종찬 후보 편에 섰던 많은 의원들이 떠나갔으나 나는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내가 이종찬 후보 편에 섰던 것은
    영남이 너무 오래 집권했기 때문에 호남에 정권을 넘길 수 없다면 중부권 출신이 한 번 집권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종찬 후보가 경선 거부선언을 하고 마침내 당을 떠났을 때 나는 그를 따라 함께 당을 떠나지는  않았다.  나도 파행으로 끝난 당내 경선에 실망하여 한떄 당을 떠날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당에 남았다.
  • 민자당 대변인 시절.(방송화면)
    ▲ 민자당 대변인 시절.(방송화면)
     내가 8년간 국회의원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한 시기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이었던 것 같다. 집권당 총재를 겸하고 있던 김영삼 대통령 아래서 민자당 대변인 1년 4개월, 신한국당 총재비서실장 2년 3개월 등 3년 7개월간 당직자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인신공격 심한 박지원 대변인과 공방전 

     민자당 대변인 시절, 나의 맞수 야당 대변인은 박지원 의원이었다.
    박 의원은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당 대표위원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 의장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대변인인 나에게까지 입에 담지 못할 인신공격을 했다. 나는 당 대변인은 당의 입장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상대당 간부에 대해 인신공격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처음 6개월간 야당에 대한 공격과 비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지원 대변인의 되풀이되는 인신공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나도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박 대변인이 뉴욕 한인회장 시절 전두환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환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공항에서 전 대통령을 환영하는 모습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복사해 기자실에 돌렸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박 대변인이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 대통령 환영위원회 위원장을 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박 대변인에게 항의 전화가 폭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사가 나간 후 박 대변인은 한동안 여당에 대한 인신공격을 멈추었다. 나는 당 대변인들의 인신공격 위주의 활동이 우리의 정치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정당의 대변인 제도를 폐지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당 대변인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북한 김일성의 사망이었다. 평양을 방문했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던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하자 야당 일각에서 조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나는 6.25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쟁 주범에 대해 조문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조문을 강력히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때까지만해도 북한에 대한 국민의 적대감이 대단했기 때문에 조문을 반대하는 성명을 낸 것은 다수의 국민 감정을 대변한 것이었다.김일성 조문을 둘러싼 논쟁은 국민들 사이로 번져 한동안 계속되다 사그러들었다.

     당 총재비서실장을 하는 동안에는 매주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 당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매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참석은 국정 전반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당시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비서관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보좌했다. 
     당 총재비서실장을 하는 동안에는 대통령이 외국 국빈방문을 하거나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외국을 방문할 때 당을 대표하여 공식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수행했다. 외국 정상과 확대 정상회담을 할 때는 회담에 배석하여 정상회담의 진행을 지켜 봤다. 

    김영삼 대통령에 세가지 건의 모두 성공

     이 기간 나는 김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건의를 했다.

    하나는 국무총리 선임에 관한 것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마지막 해에 접어들어 아들 현철의 비리가 불거지면서 국민여론이 악화되자 정국 수습책을 찾기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수석비서관회의가 있던 날 회의를 마치자 김 대통령은 나에게 집무실로 함께 가자고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김 대통령은 정국 수습을 위해 개각을 해야겠다면서 누가 총리로 좋겠느냐고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당내에서라면 이한동 국회 부의장이 좋겠고 당외서라면 고건 전 서울시장이 좋겠다고 했다. 김 대통령은 이한동 부의장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 없이 왜 고건 시장이 좋으냐고 물었다.고건 시장은 평생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돈 봉투를 한 번도 받은 일이 없는 깨끗한 공직자이며, 서울 시장 때 한보에게 택지와 관련된 불법 특혜를 주라는 압력을 거부하다 해임된 소신있는 분이라고 내가 평소 아는대로 설명했다. 김 대통령은 며칠 뒤 개각을 하면서 고건 전 서울시장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나는 내가 총리가 된 듯 기뻤다.

     두 번째 건의는 대통령 선거 당내 후보 경선에 관한 것이었다.
    아들 현철의 비리 문제를 조기에 수습하기 위해 개각을 단행했으나 악화된 국민여론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대통령은 연일 고심을 했다. 수석비서관 회의가 있던 날 회의를 마친뒤 나는 김 대통령에게 건의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김 대통령을 따라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자마자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을 앞당겨 조기에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악화된 국민여론을 잠재우려면 국민들이 아들 문제를 빨리 잊어버리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면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을 앞당겨 실시하되 선거인단 수를 10만 명 정도로 대폭 늘려 미국의 예비선거처럼 권역별로 다니며 유세를 하고 경선투표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 언론은 온통 경선 관련 보도에 집중,아들 문제를 외며할 것이라고 했다.
     당내에서는 그동안 대통령의 레임 덕 현상을 막기 위해 대통령 후보 선출 시기를 8월 정도까지 늦추려 했으나 김 대통령은 나의 건의를 받아들여 5월로 앞당겨 경선을 실시했다. 선거인단 수를 내가 건의한대로 10만 명 정도까지 늘리지는 못했으나 과거 1천5백 명 정도의 대의원으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1만5천 명으로 대폭 확대하여 권역별로 경선을 실시토록 했다.과연 9명의 경선 후보가 나서 선거운동을 시작하자 모든 언론은 이들에 관한 기사로 온 지면을 메꿔 아들 현철 문제는 그날로 언론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마지막 세 번째 건의는 김대중 비자금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씨가 신항국당 후보로 선출되자 그에 대한 국민 지지율이 50퍼센트를 훌쩍 넘어 김대중 야당 후보와의 경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유리한 위치에 있던 이회창 후보가 두 아들의 병역비리 문제가 불거지면서 지지율이 14퍼센트까지 떨어지는 위기를 맞았다. 야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선거에 승산이 없자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이 몸 무게를 조작하여 불법적으로 병역면제를 받았다고 폭로공세를 폈다. 야당의 폭로공세에 이회창 후보는 심대한 타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런 위기를 맞아 신한국당은 자신들도 김대중 후보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자고 결정하고 주로 법조계 출신 의원들로 특별대책반을 구성했다. 특별대책반은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수사 때 함께 조사했던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자료가 청와대 민정 수석비서관실에 있는 것을 알아내고 그 자료를 입수해 폭로하는 맞불작전을 펴기로 했다. 그 자료를 입수한 신한국당은 강삼재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김대중 후보가 거액의 불법 비자금을 은익하고 있다고 폭로하고 검찰에 고발했다. 언론은 강 사무총장의 기자회견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나는 그 기자회견을 보고 드디어 이들이 큰 일을 저지렀구나 생각했다.

     나는 바로 청와대 부속실로 전화를 걸어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이튿날 오후 3시에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다음날 청와대를 방문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김 대통령에게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을 검찰이 수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첫째 검찰이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을 수사하게 되면 제2의 광주사태를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정정당당하게 정상적으로 선거를 하려 하지 않고 검찰을 시켜 경쟁자를 잡으려 한다면 내가 광주 사람이라 해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제2의 광주사태가 발생하면 군대가 나와야 하고 그러면 선거를 치르지 못해 헌정중단 사태가 올는지 모른다고 했다.
     둘째 검찰이 수사를 하게 되면 국가기관의 윤리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고 했다. 남의 예금을 적법한 절차 없이 조사한 것은 대통령께서 결단을 내려 시행한 금융실명제법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으로 국가기관이 불법으로 관여한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고 했다. 김대중 비자금은 국가기관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런 만큼 잘못하면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김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뭐냐고 물어 나는 그 사건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셋째 검찰이 수사를 하게 되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때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법정에서 증언을 해야 했던 다수의 경제인들이 다시 국내외적으로 망신을 당해야만 한다고 했다. 가뜩이나 경제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의 유력한 경제인들에게 다시 국내외적으로 수모를 겪게 하는 것은 국가이익에도 어긋나는 일이라고 했다. 
     넷째 솔직히 말해 불법 정치자금은 우리 여당이 야당의 몇 배를 써놓고 야당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사하는 것은 정치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나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다. 그리고 나서 이틀 후 김 대통령은 김대중 비자금 수사를 대선 이후로 연기하라고 검찰에 지시했다. 나의 건의가 김 대통령의 결심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김 대통령의 결단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김 대통령이 검찰에 김대중 비자금 수사를 대선 이후로 연기하라고 지시하자 이회창 후보는 기자회견을 갖고 김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했다. 김 대통령은 처음에는 탈당을 단호하게 거부하다 며칠이 지나 마음을 바꾸어 탈당을 했다.

     나는 수십년간 김 대통령과 동고동락을 했던 가신그룹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당 총재비서실장으로서 2년 3개월 동안 가까이서 모셨던 분을 쫓아낸 편에 서서 선거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더우기 이회창 후보의 행위를 잘 한다고 공감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도 탈당을 했다.
     김 대통령이 탈당 한 뒤 포항에서 열린 당원 결의대회에서 신한국당은 수천 명의 당원이 참석한 가운데 김 대통령의 인형을 만들어 놓고 몽둥이질을 하고 손벽을 치며 환호하는 소동을 벌였다. 이는 공산당이나 운동권 학생들이 하는 짓이었다. 김 대통령이 비록 당을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군 통수권자였다. 군 통수권자의 인형을 만들어 놓고 몽둥이질을 하는 것은 언필칭 보수정당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우리의 이른바 보수세력은 보수가 무엇인지 모르는 무지한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이회창 낙선은 이인제 때문이 아니다

     나는 신한국당을 떠난 뒤 정치를 접을까라고 생각도 했지만 정치를 그만두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여겨 이인제 의원이 추진하던 국민신당에 참여하여 사무총장을 맡았다. 국민신당에는 이만섭 전 국회의장,홍재형 전 경제부총리,서석제 전 총무처 장관을 포함하여 현역 의원 7명이 함께했다.
     
    이인제 의원이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2등을 한 뒤 탈당하여 독자 출마를 한 것이 김 대통령이 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김 대통령은 우리 정치사에서 주류 정치세력을 떠나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점을 지적, 이인제 의원의 탈당을 끝까지 말렸으나 이 의원이 탈당 하루 전난까지만 해도 탈당하지 않겠다고 김 대통령에게 약속해 놓고 약속을 어기고 탈당을 했다는 것이 당시 청와대 정무 수석비서관이었던 조홍래 전 의원의 설명이었다.
     이인제 의원이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독자 출마를 결행한 것은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14퍼센트까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는 국민이 이 후보를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의원이 국민신당을 창당했을 때만 해도 이 의원에 대한 지지율이 30퍼센트를 넘었으나 보수세력 표가 다시 이회창 후보 쪽으로 결집되면서 이인제 후보는 대선에서 19.5퍼센트인 5백만 표를 득표해 3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회창 후보가 김대중 후보에게 패한 것이 이인제 후보 때문이라고 비난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이회창 후보가 김 대통령을 쫓아내지만 않았다면 그는 당선되었을 것이다.이회창 후보가 김 대통령을 쫓아내는 바람에 김 대통령을 지지하는 부산 경남지역 유권자들에게 김 대통령이 이인제 후보를 지지하기 때문인가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부산 경남지역 유권자들에게 그릇된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 결과 이인제 후보는 부산 경남지역에서 29.5퍼센트의 지지를 받았고 김 대통령의 고향인 거제도에서는 이인제 후보가 한 번도 가지 못했는데도 1등을 했다.
    이회창 후보의 낙선은 전적으로 그의 그릇된 행동이 가져 온 결과였다.

     대통령 선거가 종반전에 접어들면서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고 이회창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양자대결로 선거가 압축되어 가자 양쪽에서 이인제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인 나에게 은밀하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이회창 후보 쪽에서는 나의 경복고 동기인 김덕룡 의원이,김대중 후보 쪽에서는 민자당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 때 내가 비서실장을 맡아 도왔던 이종찬씨였다.
     나는 양쪽의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양쪽에서 만나자고 하는 속내는 만나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쪽은 이인제 후보의 중도 사퇴를 종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다른 한쪽은 중도 사퇴를 하지 말고 끝까지 가달라는 부탁이었을 것이다.

     나는 선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이이제 후보의 의중을 확인해 두고 있었다. 만약 지지율이 떨어져 당선 가능성이 없어지면 중도 사퇴할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이 후보는 단호하게 말했다. 장렬한 전사를 할지언정 비겁하게 중도 사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양쪽에서 만나자는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이다.

     신한국당은 선거 도중 민주당과 합당하여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꾸었다.
    한나라당은 선거에서 패배한 뒤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 대해 첫날부터 발을 걸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민주국가에서는 선거가 끝난 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선거에 패한 정당이 적어도 6개월 내지 1년간은 새 정부에 밀월기간을 주었으나 한나라당은 그러지 않았다. 당장 김대중 후보와 제휴한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국무총리 임명에 대해 인준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김종필 총재는 6개월이 지나도록 국회의 인준을 받지 못해 총리서리로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새 정부는 신한국당 정권이 초래한 외환위기를 수습해야 할 막중한 국가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국민들은 외환위기를 맞아 국민의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하자며 금 모이기에 적극 나서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외환위기를 초래한 데 대해 책임감을 느껴야 할 한나라당이 첫날부터 정부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나선 것은 큰 잘못이었다.

     나는 김영삼 대통령을 도왔던 한 사람으로 외환위기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겪게 된 데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를 조기에 수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정치국민회의의 합당 제의를 거절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합당을 앞장서 추진했다. 국민신당이 새정치국민회의와 합당을 하자 국민여론이 크게 바뀌어 김종필 총리서리는 6개월만에 국회 인준을 받아 서리 꼬리를 뗄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6대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를 해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나는 16대 총선에서 낙선을 했다 당을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선거구민은 내가 왜 신한국당을 떠나야 했는지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외환위기 극복 노력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합당에 찬성했으나 곧 김대중 정부에 실망했다. 호남편중 인사와 국가기강 문란,그리고 부정부패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정몽준의 '국민통합21' 신당창당 기획위원장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이 끝니자 나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 정몽준 의원의 국민통합21 신당 창당에 참여했다. 국민통합21 창당과정에서는 창당기획위원장을 맡아 창당 실무작업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다. 국민 지지율이 30퍼센트를 훌쩍 넘던 정몽준 의원의 지지율이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면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추진했다. 몇 차례 협상 끝에 누가 후보가 되든 집권을 하게 되면 DJP연합 처럼 공동정부를 구성 운영하기로 하고 후보는 여론조사로  결정하기로 했다.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가 이루어져 정몽준 의원은 노무현 후보를 돕는 입장이 되었다. 후보 단일화 합의는 투표 전날 정 의원의 파기 선언으로 깨어져 당초 약속했던 공동정부 구성은 실현되지 못했다. 나는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이제는 정치를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정계를 떠났다.

     내가 정치를 하는 동안 뜻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되는 것을 두어 가지만 더 애기한다면,
     하나는 정치자금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과 관련 된 것이다.
    정치자금과 관련하여 말하면 내가 국회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1만원, 2만원 등 소액 후원금 모금을 시작한 것이다. 부패정치를 청산하고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려면 정치자금을 소액화 투명화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나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소액 후원금 모금을 시작하자 좋은 반응을 일으켜 소액 후원금이 답지했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과 관련해서는 기초 지방자치단체들도 자기 지역내 학교에 대해 예산 지원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대표발의를 해서 법을 고친 것이다. 이 법 개정으로 기초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내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고 경쟁적으로 학교를 돕게 되었다.

    국회서도 '교육' ...디지털 대학교 총장 맡아

     나는 정치를 그만둔 뒤 지인의 소개로 잠시 한성디지털대학교(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으로 일할 기회를 가졌다. 내가 정치를 하는 동안 교육위원회에서 주로 활동한 것이 그런 기회를 갖게 해 준 것 같다. 나는 평소 한국의 오늘을 건설한 위대한 힘은 교육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자원이 없는 우리의 유일한 자산은 사람뿐이므로 우리 국민을 올바른 가치관과 능력있는 국민으로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는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 교육위원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내가 사이버대학 총장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한성디지털대학교 총장을 하고 있을 무렵 탈북난민이 대량 발생하고 북한인권 문제가 국내외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게 되면서 나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한인권 국제회의나 세미나가 열리면 자주 참석하여 북한의 인권상황에 관한 탈북자들의 증언을 듣고 북한동포들이 얼마나 참혹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인식하게 되었다. 사실 1990년대 중반 김영삼 대통령 시절 당 총재비서실장으로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 반기문 외교안보 수석비서관이 북한의 심각한 식량난에 관해 종종 보고하는 걸 들은 일이 있어 북한의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참혹한지는 몰랐었다.

  • 북한 인권문제 세미나에 참석한 필자.
    ▲ 북한 인권문제 세미나에 참석한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