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몸 없으면 이 흔들리듯이 당원 안 받쳐주니 당 흔들린다""제조사가 브랜드 상품 생산하듯, 정당은 책임지고 후보 내놓아야"
  • ▲ 새정치민주연합 신문식 의원이 지난달 30일 자신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신문식 의원이 지난달 30일 자신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30년 반평생을 바쳐 조용히 당을 지켜온 한 사내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조용하게 의원직을 승계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대법원 유죄 확정 판결을 받으며 의원직을 상실한 여진이 이어지던 지난 8월 24일의 일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초나라 장공(楚莊公)이 즉위한 지 3년이 넘도록 정사를 돌보지 않은 사례가 나온다. 오거(伍擧)가 "3년씩이나 날지 않았으니 이 새는 어떤 새인가"라고 간하니, 초장공은 "3년 날지 않았으니, 일단 날면 높은 하늘에 오를 것"이라고 답했다.

    이후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른 초장공은 춘추시대의 세 번째 패자(覇者)가 됐다. 장자(莊子)는 붕정만리(鵬程萬里)라고 표현했다. 한 번 날면 9만 리를 날아올랐다고 한다.

    30년 반평생 동안 당료(黨僚)로서 움직였던 그가 마침내 배지를 달고 날아오를 준비를 마쳤다. 과연 어떠한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의정활동을 보여줄 것인가. 국민들의 이목이 알게 모르게 쏠리는 가운데, 지난달 30일 의원회관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신문식 의원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도해 고흥 사람… 고2때 13시간 표류가 인생 바꿔

    신문식 의원은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1955년생이다. 그가 태어난 해 9월 18일에 해공 신익희 선생, 유석 조병옥 박사, 운석 장면 박사 등은 민주당을 결성했다. 올해 60주년을 맞이한 민주당과 그는 동갑내기인 셈이다.

    당과 함께 환갑을 맞이한 그가 반평생 30년을 지킬 당에 투신한 계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겪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위기의 경험'에 기인한다.

    신문식 의원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흑산도에 갔다가 폭풍주의보로 돌아오는 배편이 연기됐다"며 "학교에 결석을 하면 문제가 되는데, 그 다음날 폭풍주의보가 해제됐다고 해서 출항했다"고 회상했다.

    일기예보가 더할 나위 없이 부정확하던 시절이었다. 출항한 배는 높은 파도에 휩쓸려 엔진이 멈추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동력이 꺼져서 배가 표류를 하는데, 이 때는 수없이 기도하는 심정이었다"며 "차라리 배와 함께 가라앉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는 게 신문식 의원의 회상이다. 격랑 속에서 13시간을 표류하다보니, 차라리 배가 침몰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흑산도 근해에서 13시간을 표류하던 배는 비로소 구조돼 목포에 도착했다. 주민들 50여 명이 몰려나와 따뜻한 설탕물을 줬지만, 건강한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노약자로 분류된 이들과는 달리 그 이상의 구호 조치는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져 일주일 만에야 의식을 되찾았다.

    흑산도에서 배가 늦게 떠나 하루 결석하던 것에 전전긍긍해 하던 고등학생은 인생의 트라우마가 된 이 사건 이후로 완전히 변했다. 신문식 의원은 "그 고통을 머릿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반항 속에서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을 지냈다.

  • ▲ 새정치민주연합 신문식 의원이 지난달 30일 자신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신문식 의원이 지난달 30일 자신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무작정 상경해서 동교동행… 유치장에서 DJ 답장

    군대에 다녀와서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대학에 가려고 하니, 그 사이에 대입 제도가 바뀌었다. 그 전에는 고등학교 생활기록부가 어디에도 이용이 안 됐는데, 군대에 다녀오니 서류부터 면접까지 모두 생활기록부를 활용했다. 1년 동안 악몽·트라우마와 싸우며 반항의 시절을 보냈던 신문식 의원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작정 상경해서 동교동으로 향했던 것은 그 때였다.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의 '내각제 구상'에 반대해 김영삼(YS)·김대중(DJ) 양김 씨가 탈당하고, YS의 통일민주당에 대항해 DJ가 평화민주당 창당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동교동으로 향하던 신문식 의원의 가방 속에 있던 낚시 도구가 문제가 됐다. 경찰에 의해 시위대의 무기로 간주,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신문식 의원은 "유치장 안에서 김대중 총재에게 편지를 썼는데, 답장이 왔다"고 회고했다. 내용은 '우리 젊은 동지가 이렇게 나라가 어려울 때 민주화에 합류해서 같이 노력하면 나라의 큰…'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내용이었지만, 모든 것을 잃은 처지에 그보다 감동적일 수가 없었다. 신문식 의원은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 역시 대필이었지만, 천하의 김대중 선생으로부터 답장이 오니 얼굴 한 번 보는 게 소원이 됐다"고 했다.

    유치장에서 나오자마자 DJ의 편지를 가지고 다시 동교동을 향했다. 당시 DJ의 비서였던 남궁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맞이해줬다. 신문식 의원은 "그 때 남궁진 비서는 내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줬다"며 "홀홀단신 동교동을 찾아온 시커먼 서른 두 살 청년에게 '당신 같은 용기 있는 청년들이 오면 민주화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하니, 용기백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떠올렸다.

    당시 DJ는 동교동에 없고 여의도에 있었다. DJ를 면담하겠다고 해서 여의도로 가니 어림잡아 일곱 명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머릿 속으로 '한 사람이 5분씩만 면담한다고 하면, 40~50분 기다리면 되겠구나'라고 헤아리고 있는데, '선생님이 오신다'는 안내가 울려퍼졌다. 그러자 일곱 명이 한꺼번에 올라갔다.

    신문식 의원은 "처음 보는 김대중 총재에게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도 몰랐다"며 "머리를 숙여야 할지, 엎드려서 인사를 해야 할지…"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고민하는 찰나, DJ는 한 손을 가볍게 들며 "여러분 반갑다, 나라가 힘들 때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으로 면담은 끝났다. "단 1분이라도 개인 면담을, 독대할 것으로 봤는데 여러 명이 얼굴 한 번 본 것으로 끝났던 것"이다.

    ◆대하빌딩 지하주차장서 67인 모아 도원결의

    오기가 생겼다. 신문식 의원은 "도저히 안 되겠다, 김대중 선생을 개인 면담 하지 않고서는 내려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만날 길이 없었다.

    하릴없이 평민당 창당 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여의도 대하빌딩을 드나들고 있는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창당을) 도와주러 왔는데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었다.

    신문식 의원은 그들을 상대로 "안 오면 말 것이지, 볼썽사납게 와서 욕을 하는 것은 뭐냐"고 힐책했다. 옥신각신하면서 점차 뜻이 맞는 사람들이 한 명씩 두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모인 사람이 67명에 이르렀다. 신문식 의원은 이들과 함께 대하빌딩 지하4층 주차장에서 결의를 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불평불만을 갖지 말자고 결의했다"며 "김대중 선생과 민주화를 위한 자원봉사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게 신문식 의원의 회상이다.

    이후 이 67명은 1987년 대선에서 일종의 별동대가 됐다. 아침에 67명이 모이면 신문식 의원이 사비를 털어 버스 토큰 하나씩을 지급했다. 평민당에서 유인물이 나오면 함께 나눠줬다. 2인 1조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영등포와 청량리를 누비며 유인물을 배포하고, 저녁 7시쯤 유인물이 다 떨어지면 철수하는 생활이 반복됐다.

    신문식 의원은 "한동안 그렇게 일하다보니 어떻게 알고 식권이 나오더라"며 "순수한 자원봉사라고 결의했기 때문에, 나오는 식권을 받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한 달 정도 지나니 자동차 키도 나왔다"고 회상했다.

    그는 "우리 활약이 엄청났다"며 "지금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혈맹처럼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그런 조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른바 위(?)에서 이들의 활약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별동대를 홍보위원회로 편입하려는 시도도 있었고, 그를 홍보부장으로 임명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신문식 의원은 모두 거절했다. "동교동계 그 분들이 만나자고 해도 일절 만나지 않았다"며 "김대중 선생이 만나자고 하면 몰라도…"라고 슬몃 웃었다.

  • ▲ 새정치민주연합 신문식 의원이 지난달 30일 자신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신문식 의원이 지난달 30일 자신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동향인 고흥 출신 박상천 전 대표 정계로 이끌어

    그리고 1987년 대선은 끝났다. DJ는 3위로 낙선했다.

    신문식 의원은 "여기 (서울에)서 회식을 하면 사고가 날 것 같았다"며 "돼지 한 마리와 솥단지를 가지고 남한산성으로 가서 술 먹고 풀어버리고 광주로 내려갔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뒷말 많은 정치권의 생리가 그를 붙들었다. 회식비를 누가 지원했느냐는 말이 돌았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회식비 받으려고 그 고생을 했겠느냐"는 게 신문식 의원의 항변이다. 안 올라왔으면 정치와는 인연이 멀어졌을텐데, 그런 소문이 도는 것을 따지기 위해 서울로 다시 올라오니 윗 사람들과 만나고, 다시 당에 엮일 수밖에 없었다.

    당의 직책을 받고나서 처음 뛰어든 전장은 바로 이듬해에 치러진 1988년 총선이었다. 직전해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세 개의 정당(YS의 민주당, DJ의 평민당, 김종필 전 국무총리(JP)의 공화당)이 급조됐다보니, 이듬해 총선은 제대로 의석을 갖추고 원내에서 활동하기 위한 싸움이 뜨거웠다.

    신문식 의원은 당시 전남의 두 격전장으로 목포와 고흥을 꼽았다. 전남 목포에는 유신정우회~공화당~민정당을 거치며 국회부의장과 체신부장관도 지낸 4선의 최영철 전 의원이 버티고 있었다. 여기에 DJ가 대항마로 내세운 것이 자신의 분신이라 불린 권노갑 상임고문이었다.

    또, 전남 고흥에서는 신문식 의원의 종씨(宗氏)인 4선의 신형식 전 의원이 정치활동 금지에 묶인 틈을 타 재선했던 민정당의 이대순 전 의원이 버티고 있는 가운데, 신형식 전 의원의 동생인 신중식 전 의원이 평민당 공천으로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는 공화당 출신으로 건설부장관까지 지낸 신형식 전 의원의 동생 신중식 전 의원을 평민당에서 '필승 카드'로 생각지 않았다는 점이다. DJ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은 박상천 전 대표였다. 당시 박상천 전 대표는 순천지청장을 끝으로 검찰에서 물러나 순천에 변호사로 개업한지 8개월째였다.

    역시 고흥 출신인 신문식 의원이 사신(使臣)의 역할을 맡았다. 동교동의 지령은 '박상천 변호사가 공천을 주면 총선에 나갈 것인가를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신문식 의원은 "박상천 대표 사모를 먼저 만났는데 '우리 정치 안 합니더~' '승산도 없는 정치를 와 하노'라고 하더라"고 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순천지청장을 그만 둔 지 고작 8개월, 한창 전관예우로 돈을 벌 때인데 정치를 할 것 같지가 않았다.

    "'더 이상 이야기가 안 되겠다, 가자'고 생각하고 일어서는 순간, 배웅 나온 박상천 대표가 등 뒤에 대고 '검토하겠다'고 하더라"는 게 신문식 의원의 회상이다. 그로부터 논의가 급진전돼서 결국 박상천 전 대표는 임채정 전 국회의장,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함께 평민련 영입 99인 중 한 명으로 들어왔다. 고흥 출신의 대정치인인 박상천 전 대표를 영입해 온 게 신문식 의원이었던 셈이다.

    동교동의 임무는 성공했지만, 종중에서는 난리가 났다. 박상천 전 대표가 영입되면서 고흥 공천이 뒤바뀌어 종씨인 신중식 전 의원이 낙천됐다. "이미 (김대중) 선생과 이야기가 돼서 지역 활동을 하고 있다"고 공언하던 신중식 전 의원으로서는 면목도 없고, 망연자실한 일이었다. 신문식 의원은 "'이 XX들 뭣하고 있느냐'고 난리가 났는데, 종중에는 올해에야 (사태의 전말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고 웃었다.

    ◆30년 당 지킴이… 공백은 열우당 분당 3년 뿐

    공천을 통해 대진이 확정된 이후 1988년 총선판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권노갑 고문은 신문식 의원에게 "정예화된 20명만 데리고 와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신문식 의원은 "대하빌딩 67인 결의자 중 팔팔한 20명을 데리고 목포로 내려갔다"고 회상했다.

    신문식 의원은 "20명이 여관 방 두 개에서, 방 하나에 10명씩 잤다"며 "유달산이고 뭐고 할 것 없이 2인 1조로 하루 종일 유인물을 돌렸다"고 설명했다.

    선거운동기간 중 11일이 지나자 권노갑 고문이 신문식 의원을 다방으로 불렀다. 권노갑 고문은 "최영철을 이길 수 있겠다, 이긴 것으로 답이 나왔다"며 "가장 치열한 선거가 벌어지고 있는 고흥으로 가서 (선거를) 도와달라"고 주문했다.

    여기까지는 고흥 출신인 자신에게 당연한 부탁이려니 했다. 하지만 권노갑 고문은 "8명만 데리고 가라"고 했다. 신문식 의원은 "여기까지 와서 12명을 철수시킬 수 없다, 혈맹인데 가려면 다 같이 가고 안 가려면 안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발했다. 반발이 계속되자, 동향인 박상천 전 대표와 직접 전화 연결이 됐다. 박상천 전 대표는 웃으며 "고흥은 목포처럼 크지 않다, 20명은 너무 많으니 8명만 데려오라"고 했다. 후보 본인의 부탁에 "눈물을 머금고 송별식을 하고 12명을 서울로 철수시켰다"고 신문식 의원은 떠올렸다.

    박상천 전 대표는 이 때 당선된 뒤 전남 고흥에서 5선을 하고, 민주당의 당대표까지 지냈다. 평민당 입당으로 보면 신문식 의원이 선배이지만, 박상천 전 대표는 동향 어른이었다. 선거를 계기로 만들어진 귀한 인연은 이후 내내 두 사람을 묶었다.

    일례로, 30년 동안 꾸준히 당을 지켜온 신문식 의원이지만 3년 간의 공백이 있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으로부터 열우당이 분당됐을 때가 그 때다. 국회 정책실장(1급)을 하고 있던 신문식 의원은 두 쪽이 난 당을 보자, 두 말 않고 돌아서서 깨끗이 낙향했다.

    이런 그를 다시 당으로 불러들인 것이 박상천 전 대표다. 민주당 대표가 된 박상천 전 대표가 "같이 하자"고 광주와 서울을 오가고 있던 그를 불렀다. 신문식 의원은 "오로지 초심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당에 몸을 맡겼다"고 설명했다.

  • ▲ 새정치민주연합 신문식 의원이 지난달 30일 자신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신문식 의원이 지난달 30일 자신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누가 감히 내게 친노~비노를 묻겠느냐"

    의원직을 승계한 신문식 의원의 계파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워낙 새정치민주연합의 계파가 복잡하고 다툼이 심하기 때문이리라. 일각에서는 그의 출신과 행적을 통해 계파를 유추해보기도 하는 모양이다.

    신문식 의원은 "당과 내가 동갑이고, 환갑을 같이 맞이했다"며 "감히 나보고 비노·친노를 물어보는 사람이 없다"고 일축했다. "탈당계 한 번 써본 적 없고, 이 당에서 내 발로 걸어나갈 일 없는 내게 누가 감히 친노냐 비노냐 물어보겠느냐"는 게 신문식 의원의 일갈이다.

    다만 30년 당료 생활을 하면서 계파에 대한 우려가 없을 수 없고, 나름의 관점이 없을 리가 없다. 신문식 의원은 "합리적 진보와 건전한 보수, 이런 저런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 주장을 펴는 곳이 정당"이라며 "(다른 계파를) 적으로 간주해서 '내 편이 아니면 적'이란 식으로 보는 게 문제"라고 일침했다.

    오히려 신문식 의원은 계파의 존재 그 자체보다도, 계파를 넘어 당원들을 하나로 묶는 당의 기풍이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정당 조직(의 당원)은 지역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나이가 다른 사람들"이라며 "저녁에 한 자리에 모여서 술잔을 기울이고 덕담을 나누며 하룻밤 자면 만리장성을 쌓고, 우리 당의 지킴이이자 견고한 반석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당원 훈련 연수 같은) 게 어느 순간 없어졌다"며 "언제부터라고는 말씀 안 드려도 알 것"이라고 개탄했다.

    지나치게 온라인·모바일·네트워크만 강조하다보니 오프라인에서 형성되는 관계를 통해 당의 버팀목 역할을 하던 정예 당원들이 모습을 감추지 시작한 것이다. 신문식 의원은 "옛날의 정예 당원이라고 하면, 당보가 나오는대로 마을회관이든 어디든 가서 뿌렸다"며 "당이 살아움직이는 모습이었고, 거기로부터 당의 역동성이 나왔다"고 회상했다.

    "반석 위에 놓여 있는 당이냐, 사상누각의 당이냐는 다른 게 아니다"라며 "스물 몇 번 지도부가 바뀌면서 잇몸이 없어지면 이가 흔들리듯이 당원이 받쳐주지 않으니 당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흔히 어르신들이 파국(破局)을 목격하게 되면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보다'라고 하듯이, 30년 당료 생활을 하면서 당원 조직이 이 정도까지 흔들리는 것을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진한 회한과 당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비롯된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공천은 수공예… 국민에게 후보 책임지고 선보여야"

    신문식 의원은 최근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공천 문제에 대해서는 유독 말을 아꼈다. 일찌감치 공천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30년 당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공천 제도를 두루 섭렵해보며 그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는 그였지만 민감한 사안으로 번질라치면 손사래를 쳤다. 이제 겨우 의원직을 승계했는데, 정무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함부로 언급한다는 이미지를 꺼리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공천 과정에서 당원의 참여와 정무적 판단이 아예 배제돼서는 안 된다는 점만은 강조했다. 당원 참여 강조는 대체로 당내 비노 측의 주장이며, 정무적 판단(전략공천 등)은 친노 측의 지론이다. 어느 계파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최근 새정치연합이 60주년을 맞아 발굴하고 있는 이른바 '뿌리당원'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목소리다.

    신문식 의원은 "당원을 무시하면서 의무만 강조하고 권리를 안 줘서는 안 된다"며 "전당대회를 할 때마다 제도가 바뀌면서 혼선을 주고 당원을 신뢰하지 않으니, 지지층이 붕괴된다"고 꼬집었다.

    안심번호 국민공천제에 대해서는 손보기에 따라 좋은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지역에 따라서는 보완책이 필요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신문식 의원은 "(지방 농어촌에서는 안심번호로 선거인단에 선정되면) 자랑삼기 때문에 노출이 다 될 것"이라며 "무슨 비밀이라고 그걸 감추겠느냐"고 우려했다.

    아울러 "(노출)돼다보면 '누구 찍었느냐' 하면서 편을 가를 것"이라며 "(경선 후보자들은) 한 번씩 다 찾아가서 '찍어달라'고 설득하면서 동네 갈등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좀 보완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천에 있어서 당 지도부의 정무적 판단도 일정 부분 필요하다고 봤다. 물론 자기 계파를 꽂는 공천은 안 된다는 전제 하에서 "정당민주주의는 책임정치가 우선돼야 하기 때문에, 제조사가 브랜드를 갖고 상품을 생산하듯이 우리는 국민에게 후보를 책임지고 선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공천은 수공예와 같다"고 빗대기도 했다. "당에서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다듬어서 하는 작업이 공천"이라며 "그것이 책임정치의 구현이기 때문에, 기계로 돌려서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 ▲ 새정치민주연합 신문식 의원이 지난달 30일 자신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신문식 의원이 지난달 30일 자신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의원되자마자 농해수위서 맹활약… 어민과 눈높이 맞춰

    19대 국회의원의 임기가 8개월 정도 남은 시점이다. 향후 의정 활동과 정치 활동의 계획을 묻는다면 당연히 20대 총선에서 재선(再選)하는 것을 전제로 묻는 셈이 된다. 신문식 의원은 이러한 질문을 받자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내년에? 내년은 내년을 가봐야 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다도해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고흥에서 태어나, 바다 위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겪었던 점, 또 그 때문에 정계에 몸을 담고 30년 당을 지키게 됐던 점을 회상하며, 정치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면 그 활동이 바다와 유리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현재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농해수위)를 상임위로 삼아 활동하고 있다.

    같은 당 국회의원이며 같은 농해수위 소속인 유성엽 의원(전북 정읍)은 '멸치 그물을 사랑한 남자'라고 불린다. 지난해와 올해 국정감사에서 어민들에게 멸치 포획을 허용하는 면허증을 발급해 놓고서도 정작 멸치를 잡을 수 있는 세목망(촘촘한 눈을 가진 그물) 사용을 금지하는 것을 끈질기게 따지고 추궁했기 때문이다.

    신문식 의원도 이에 공감했다. 그는 "무지한 사람들이 그물코를 적게 하고 끌고 다니면 치어를 잡아서 어자원이 고갈된다고 한다"며 "시속 1~1.5노트로 서서히 가기 때문에 어차피 잡힐 것만 잡히고 도망갈 고기는 다 도망가는데 어째서 어자원 고갈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울러 "시기별로 (세목망을 써서) 잡고 못 잡고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시스템만 갖춰놓고, 불법어로를 단속하면 되는 건데…"라며 "어민들이 얼마나 아우성인지를 모른다"고 탁상행정을 비판했다.

    ◆"누구보다도 자신 있어… 바다에 한 맺힌 사람"

    그러면서 "박근혜 정부의 최고 업적은 윤진숙 전 장관을 해수부 장관으로 썼던 것"이라고 평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더니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르는 사이"라면서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해양) 전문가"라고 평가했다.

    그 근거로 신문식 의원은 윤진숙 전 장관이 적조 피해가 심각한 남해안에 가서 가두리 양식장 방류를 한 것을 꼽았다. "그것이 정답"이라며 "가둬놓은 고기를 풀어놓으면 다 살 것을, 죽여서 폐기한다"고 혀를 찼다.

    적조가 왔을 때 마냥 가둬놨다가 다 죽고 보험료까지 나가고 따로 보상까지 할 바에는, 보상만 하고 방류시켜버리는 게 해법이라는 것이다. 물고기는 살고, 어자원은 풍부해지고, 보험료도 나가지 않으니 일석삼조가 아닐 수 없다.

    신문식 의원은 적조 때 방류를 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불이 났을 때 집안에 가둬놓는 것과 똑같다"며 "불이 나면 산소가 없어서 질식사하는 것인데, 물고기도 얼른 도피시켜야지, 안 그러면 산소가 없어서 죽는다"고 알기 쉽게 비유해서 설명했다.

    그런 훌륭한 윤진숙 전 장관은 왜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물러나야 했던 것일까. 신문식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과 윤진숙 전 장관이 (적조 때 물고기를) 방류하는 것을 보고 '제대로 된 해수부장관이 됐구나' 싶었다"면서도 "국회에 오면 백지가 돼버린다고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바다를) 알지도 못하는 의원들이 들쭉날쭉한 질문을 던지니 웃음이 날 수밖에… 내가 봐도 가당찮은 질문이었다"며 "그걸 무지한 국회의원들이 바보 윤진숙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라고 개탄했다.

    이처럼 신문식 의원은 바다에 대해서 확고한 소신과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인터뷰 내내 공천 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말을 아끼던 신문식 의원이 유독 목소리를 높인 대목이 당(黨) 그리고 바다(海)였다.

    신문식 의원은 "누구보다도 나는 바다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다"며 "해수부 모 국장은 나더러 '신문식 의원은 바다에 한이 맺혀 있는 사람 같더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해수부를 부총리급으로 격상해야 한다는 등 해양 기반 발전 전략을 제시했다. 그는 "국감이 끝나면 바다목장 견학을 가보려고 한다"며 "바다에 있어서만큼은 이론적으로 연구한 지식이 아닌, 필드에서 어민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끼는, 그런 활동을 하고 싶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