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전 11시 카톨릭 청년회관서 '북 콘서트'
  • 청구인(정부)측 검사: "증인이 보시기에 주사파 NL 세력이 약화되었습니까, 세력이 약화되었다면 위험하지 않은 건지 그 점에 대해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종철 스토리케이 대표: "글쎄요, 핵심적인 주사파 숫자로 보면 80년대, 90년대 보다는 숫자가 줄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한번 되물어 보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감옥 갈 각오 하고 자신의 사명에 따라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좀 외람된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들 감옥 갈 각오 하고 한반도 이남에서 혁명 운동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희생하는 사람들이고 헌신하는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이 5백명, 천 명 대한민국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글쎄요, 어떨 것 같습니까?"

    - 2014년 7월 22일,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 해산 심판과 관련, 지난 7월 22일 청구인 '대한민국 정부' 측 증언자로 나서 '통합진보당의 위험성'을 경고한 스토리케이 이종철 대표. 그는 1990년대 중반 [주사파 운동권]이 된 ‘끝물 운동권’ 세대다. 1992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총학생회장에 올랐고, 1996년 8월에는 연세대 사태로 구속 옥고를 치렀다.

  • 1998년 3월 출소한 뒤 전향했다. 재판정에서 그는 두시간여 가까이 통합진보당의 위험성을 헌법재판소가 직시해야 한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았는지 더욱 자세하게 주사파의 실체를 파헤친 책 <진보에서 진보하라>를 최근 출간했다.

    그가 쓴 책은 그가 실제로 겪은, 일반인들은 알 수 없던, 통합진보당 등 [주사파]의 ‘어두운 그늘’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중심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그는 오는 29일 오전 11시 카톨릭 청년회관(홍대입구역 근처)에서 책 출간기념회를 갖고 책에서도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 해삼심판 결정이 올해 안에 내려질 것으로 예상돼 더욱 눈길을 끈다.

    다음은 이종철 대표의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사건 관련 헌법재판소 출석 증언 녹취록' 전문

    청구인(정부)측 검사(이하 생략):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는 등 학생운동을 한 사실이 있으시지요?

    이종철(이하 생략):
     예, 그렇습니다.

    학생운동과 관련한 구체적인 경력은 어떠신가요?

    = 저는 1992년도에 고려대학교에 입학을 했고, 1학년 때 많은 고민과 방황을 했고 1학년 말에 학생운동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1996년에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을 했고, 연대사태로 구속 수감되어서 실형 2년을 받고 복역하다가 1998년 3월에 출소를 했습니다.

    출소하신 이후의 경력은 어떠신가요?

    = 출소 이후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됐고요, 생각의 전환과 함께 사회에 나오면서 바로 사회운동을 하게 됐습니다. 열린사회시민연합이라는 시민단체에서 출발해서, 강서양천 지부에서 탈북자지원사업으로 탈북 아동 청소년과 대학생 자원봉사자를 자매결연하는 멘토 멘티 사업을 했고, 이후에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등에서 북한 인권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2011년부터 현재 제가 몸담고 있는 단체를 창립해서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대학 입학 후에 학생운동을 하게 된 경위는 어떤가요?

    = 대학에 가서 제가 운동권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 게 결정적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극예술연구회라는 연극하는 동아리였는데 그 동아리가 연극을 하지만 또 학생운동을 함께 하는 운동권 동아리였고 주사파 노선에 따라서 운동을 하는 동아리였습니다. 선배들과 함께 데모에도 나가고 같이 학습을 하면서, 점점 운동권이 되어갔던 것 같습니다.

    학생운동 하실 당시에 학생운동권의 노선은 어떻게 나눠볼 수 있습니까?

    = 크게 보면 NL과 PD 이렇게 명명이 되어서 구분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구분해 볼 수 있지요? 간략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NL은 민족해방의 줄인 말이고요,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자주 민주 통일의 과제를 앞세우면서 운동을 하는 계열입니다. 한국 사회의 모순으로 자주의 문제가 실현되지 못한 것을 가장 크게 두고요, 그래서 민족해방 투쟁을 가장 앞세우고 있고 북한을 모델로 해서 운동을 했습니다. 반면에 PD 같은 경우에는 민중민주의 줄인 말인데요, 계급 투쟁을 앞세우면서 전통적인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해서 운동을 펼쳤고, 구소련을 모델로 해서 운동을 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음 NL과 PD의 노선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NL계열에서는 특히 조직애 또는 동지애 이런 것을 강조한다고 알고 있는데 어떤가요?

    =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NL계열이 당시 학생운동의 다수였고 즉 한총련 안에서 다수였고 한총련을 중심으로 운동 대오가 통일 단결해서 투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한총련 안에서 소수파들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통일단결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NL계열 내에서 당연히 통일단결이 전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직성이 아무래도 더 강하고 동지애를 매우 강조했었습니다.

    제가 참고로 한 가지 인용을 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실제로 학습을 했던 내용인데요. 1986년에 “주체사상 경향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라고 하는 김정일 명의로 나온 문건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노작이라고 부르지요. 여기서 특히 강조하는 내용이 혁명적 수령관을 튼튼히 세우는 것입니다. “인민대중이 혁명의 자주적 주체로 되기 위해서는 당과 수령의 영도 밑에 하나의 사상, 하나의 조직으로 결속되어야 한다” 이렇게 나오고 있고요, 수령과 전사의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혁명적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라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변함없이 오직 자기 생명의 모체인 수령 당 대중과 생사 운명을 같이해 나갑니다”, 이렇게 직접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많이 불렀던 노래가 ‘동지의 노래’라고 하는 것이거든요. 가사가 어떻게 되냐 하면,

    가는 길 험난하다 해도 시련의 고비 넘으니
    불바람 휘몰아쳐와도 생사를 같이 하리라.
    천금 주고 살 수 없는 동지의 한없는 사랑
    다진 맹세 변치말자 한 별을 우러러 보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1절이고 2절로 또 넘어 가는데 여기서 얘기하는 한 별이 김일성입니다. 이런 동지애의 노래를 한 백명 정도 되는 활동가들이 쭉 둘러서서 손을 꼭 잡고 같이 합창을 하고 했었습니다.

    NL계열에서는 증인의 경험에 비추어서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합니까?

    = 북한 인권 문제와 관련해서, 이 문제도 사실 북한에서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라고 하는 1994년도에 나온 김정일의 노작이 있는데, 거기에 인권문제와 관련해서 설명이 되고 있거든요. 기본적으로 주사파들은 북한에는 인권 문제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사실 북한 인권 자체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어 대두되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가능하면 에둘러서, 피해서 이야기하도록 했고요, 그러면서 주로 했던 얘기가 자본주의적인 눈으로 사회주의의 인권을 재단하지 말라,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고유의 인권이 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서 제가 말씀드린 그런 노작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서, 제국주의로부터 억압받고 있는 사회야말로 인권이 가장 말살되고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냐? 우리나라가 식민지이고 미 제국주의로부터 억압받고 있는데 이런 나라에서의 인권이야말로 가장 문제가 되는 인권인데 이런 것부터 먼저 이야기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러면 북한의 권력세습, 2대이건 3대이건 권력세습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 제가 활동할 당시에는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넘어갈 때였습니다. 물론 실제적으로 김정일이 권력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지만, 현상적으로는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로 넘어가는 그 즈음이었고 김정일이 어쨌든 세습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학습을 했었습니다. 

    이 문제는 ‘후계자론’이라고 해서 내용적으로 정립이 되어 있었고요, 그것을 대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이 당시에는 ‘정통과 계승’이라고 하는 책이었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나와서, 그걸 보면서 후계자 문제를 스스로 학습하고 입장 정리를 해갔는데요, 후계자가 세워지는 과정은 그야말로 특별한 과정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김정일이 그만큼 후계자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으니까 후계자가 되는 것이고 앞서의 지도자를 충분히 그만한 역량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가 이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정일의 업적을 다양한 형태로 설명을 해 놓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정에서 세습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다. 세습이 뭐가 중요하냐. 어떤 지도자가 나와서 전대 지도자의 뜻을 올 곧게 이어가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혁명을, 얼마나 전대의 지도자의 뜻에 따라서 그대로 계승해서 이어갈 것이냐, 이게 중요한 것이다. 그에 대한 적임자가 누구냐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2010년경에 김정은이 3대세습자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저는 참으로 놀랍게도 한국의 어떤 언론인이 글로 쓰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것은 필요하면 증거자료로 한번 보시면 어떨까 싶은데, 미디어오늘이라고 하는 언론사에 게재가 된 ‘자기잣대로 북을 재단하지 말라’라고 하는 제목의 글입니다. 정일용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연합뉴스에 논설위원이시고 기자협회 회장이시더라구요, 그 분이 쓰신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이 그대로 당시에 제가 학습하면서 봤던 내용을 옮기고 있어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내용을 보시면 아, 이 주사파들이 어떤 식으로 세습 문제를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그 분은 주사파는 아니지 싶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조차도 이렇게 이해를 하고 설명을 하고 있구나, 이런 게 저는 굉장히 놀라왔는데 한 번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2012년 5월에 ‘돌직구녀’ 기억하시지요? 100분 토론에서 이상규 의원이 답변을 끝까지 거부한. 주사파 운동을 할 당시에 북한 인권이나 세습 문제와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 저는 당시 이상규 의원이 참 잘 피해가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활동할 때랑 거의 그대로이고요. 그야말로 그런 식으로 피해가도록 나름대로 자체적으로 대응 논리도 가지고 있거든요.

    예를 들면 기본적으로 일반인의 시각에서 불리할 수 있는 세습 문제라든지 북핵 문제 이런 것은, 세습 문제는 제가 앞서 설명을 드렸고 북핵 문제 같은 경우도 한반도의 평화체제가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가지고 북한을 압살하는 것 그게 원인이 됐지 않느냐? 궁극적으로 평화협정을 통해서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에둘러서, 그런 관점에서 핵문제를 접근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설명을 했었습니다.

    증인은 어떻게 주체사상을 접하게 됐습니까? 

    =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많은 고민을 하면서, 부분적으로는 듣고 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직접적으로는 1학년 겨울에 합숙을 가서 주체사상을 쉽게 해설해 놓은 ‘사람과 세계’라는 책을 가지고 세미나를 하고 토론을 하면서였습니다. 그게 어쨌든 직접적으로 주체사상을 접했던 것이 아닌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 이후에 주체사상과 관련된 책은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에 대하여’를 비롯해서 굉장히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 책은 지금도 도서관에 가면 있고요. 거기 노작에 다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물어보시는 그런 내용들이 거기에 나와 있고 그런 내용들을 당시에 학습을 하면서 많이 습득을 해갔습니다.

    주사파가 되는 게 어떻게 보면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납득이 안 될 수도 있는데, 고등학교 때까지 평범한 모범생이었는데 고려대학교에 입학해서 주사파가 된 어떤 특별한 계기 같은 게 있습니까? 간략히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 간략히 얘기를 드리겠습니다. 저도 제가, 사람들이 물어보기를 어떻게 그렇게 주사파가 될 수가 있냐?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질 수가 있냐? 그런 물음을, 무슨 어떤 특별한 게 있어 가지고 그렇게 되지 않았냐는 이런 전제를 깔고 물음을 많이 던지는 것을 접했습니다.

    사실 저는 주사파가 되는 과정이 극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과정이 아닌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꾸준한 과정인거지요. 한 가지 예만 들어 드린다면 처음에 대학을 가게 되면, 예를 들어 3월 달에 신입생 환영회를 하고요, 4월 달이 되면 당장에 4·19 기념 세미나가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큰 사업이거든요 학생회에서. 그런데 이 4·19는 우리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민주화 운동의 큰 의의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지요. 그런 어떤 기본적인 취지 정도만 들여다 보고 같이 공유를 하고 공감을 하고 이런 정도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는 거지요. 이승만은 부정일변도로 묘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김일성이 나와요. 김일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거든요. 이승만은 일제시대 때 외교독립론 외치면서 미국에 가서 편안하게 독립운동했다. 그런데 김일성은 만주벌판 달리면서 풍찬노숙하면서 총칼로 일제에 저항한 인물이다. 그리고 남과 북의, 남쪽에서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던 과정은 대단히 폭력적이고 물리적 폭압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북한에서 김일성은 봐라, 북한 주민들이 그렇게 대대적으로 환영을 하면서 김일성이 북한으로 입성을 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 중심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면 상당히 놀랍고 또 호기심도 생기는 겁니다. 도대체 사람 중심의 사회주의국가라는 게 어떤거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요. 이런 정도로 이야기를 하면서 4·19를 이야기하고.

    또 5·18을 가게 되면, 당시 미국이 항공모함을 한반도 인근으로 보냈는데 처음에 광주의 민중들은 미국이 항공모함을 보내서 우리를 지켜줄려고 하나 보다 이렇게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전두환 독재를 인정했다. 이게 무엇을 말하는 거냐?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식민지로, 미국의 주구 정권으로 전두환 정권을 인정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거든요. 그래서 5·18은 반미운동의 핵심입니다.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현대사에 있어서의 민주화운동적 의의 차원에서의 그런 역사적 사건의 조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어떤 경도된 의식으로 가게 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설명을 드릴 수 있는데 생략하구요 그 외에도 많은 과정들이 있습니다.

    저도 1학년 동안 정말 많은 방황을 했는데요. 저도 청운의 꿈이 있었고, 사실 저의 꿈은 법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면서 1년 동안 데모하러 나왔다가, 동아리실에 왔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가 선배들 피해서 도망갔다가 다시 왔다가를 몇 번을 반복하면서 군대에도 갈려고 했었고요. 그런 과정에서 뿌리치지 못하고 저 역시 학생운동을 해야 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 일련의 과정, 그 고민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거든요. 제가 공장에 가서 직접 노동자들의 삶을 보려고 했습니다. 시골 촌놈이 서울에 올라와 가지고 도대체 서울에 공장이 어디에 있는지 지도 하나 펼쳐놓고 제가 찾아 갔거든요. 그런 많은 고민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결심을 하는 거지요. 그래서 학생운동을 하게 되고 조금씩 조금씩 더 나아가면서, 주체사상도 받아들이게 되고 주사파로서 결의 높은 운동가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구체적으로 한총련 등 총학생회 활동에 대해서 여쭤보겠습니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역임하고 한총련 의장 또 서총련 의장 선거에도 출마한 바 있지요? 

    = 예.

    어때요, 한총련은 NL계열 노선입니까?

    = 예, 그렇습니다. 한총련이 다수가 NL계열이거든요. 그 당시에 제가 대학 다닐 때는 4년제 대학교가 한 120여개 대학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대학의 총학생회의 한 90% 정도가 NL계열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 NL계열의 총학생회가 중심이 되어서 NL노선에 따라서 학생운동을 했다고 보면 되고요. 그래서 한총련 강령을 봐도 일제 식민지 해방 투쟁을 계승하고 그리고 미제의 침략에 저항을 하고 자주적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연방제 통일을 실현한다 라고 하는 그런 강령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미국을 반대하고 모든 외세의 부당한 정치·군사·경제·문화적 간섭과 침략을 막아내고 목숨보다 소중한 민족자주권을 회복하여 조국의 자주화를 이룩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민주의 요구가 되겠고요. 세 번째에 연방제 조국 통일 한다 이렇게 나오지요. 조국의 영구 분단을 막아내고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 아래 연방제로 조국을 통일 한다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기층 민중뿐 아니라 모든 애국적 의식을 가진 각계각층과 굳게 연대하고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전세계청년학생들 하고 공동으로 싸워나간다. 이런 내용이 제가 당시에 봤던 한총련 강령입니다.

    옛날에 학생운동할 때 선거를 많이 경험 했을텐데, 선거 과정 등에서 보통 PD계열은 NL계열을 어떤 식으로 비판을 하는가요? 또 비판의 내용이 뭐였습니까?

    = NL계열과 PD계열이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분에서 차이를 나타내고 정책적 차이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선 후보 전술과 관련해서 즉 선거 전술과 관련해서 PD계열은 독자정당을 수립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민중정당을 수립해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민중독자후보론을 내세웁니다.

    그러면 NL계열 같은 경우에는 통일전선전술에 입각해서 그것은 너무 급진적이다 라고 비판했구요. 그래서 민주대연합노선에 따라 우리가 연대할 수 있는 후보를 선택해서, 그 후보를 중심으로 해서 민주대연합노선에 따른 통일전선전술을 선거의 시기에 후보 전술로 채택하는 것이 적합하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NL계열 같은 경우에는 사실 남쪽에서 어떤 합법정당을 만든다 라고 하는 것이 이게 이론적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북한에 조선노동당이 있는데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남쪽은 미수복지역입니다. 북한의 혁명지도부가 장차 수복해야 될 지역이지요. 북한의 혁명지도부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부입니다. 그 유일한 정부가 조선노동당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국제공산주의운동 원리에 비추어 보면 이 조선노동당은 한반도의 유일 정당이지요. 그러니까 국제공산주의운동은 1국가 1정당 체제로 되어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한 정당밖에 인정할 수 없지요. 그러면 조선노동당이지요. 조선노동당이 있는데 어떻게 거기에 비견할 정당을, 쉽게 얘기해서 감히 건설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PD들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조선노동당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조선노동당을 오히려 반대하고 그런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사회주의 계급정당을 건설하자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지요. 그런 면에서 또 차이가 있고 그리고 이런 부분도 있습니다. 제가 총학생회 선거 나왔을 때에도 그랬는데, 주사파라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선거가 굉장히 치열해지다보면 마지막 어떤 수단으로, 마지막 전술로 상대편을 공격하는 그런 예가 바로 저 후보들은 주사파다 이런 겁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학우들한테 거부감이 불러일으켜질 수가 있지요. 그러면 NL계열의 후보들, 저 역시도 그때 그렇게 대응을 했었는데, 이거는 마녀사냥이다, 어떻게 적 앞에서 동지를 이렇게 헐뜯을 수가 있느냐? 이런 식으로 방어를 하면서 오히려 상대방을 더 공격하는 그런 식으로 대응을 했었습니다.

    지금 보면 마지막으로 주사파라고 공격을 했다고 표현을 했는데 마지막,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PD들도 NL이 주사파라는 것은 다 알고 있지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무슨 취지지요?

    =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늘 그런 논쟁을 하고 NL들 보고 너희들은 김일성만 추종하는 단순무식한 인간들이다 이렇게도 이야기를 하고요. NL은 PD들 보고 너희들은 그냥 머리로서 운동을 하냐 라고 비판을 합니다. 그람시, 트로츠키, 레닌 사회주의 혁명가들 많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다 놓고 공부를 하는 게 PD계열이거든요. 물론 레닌을 수령으로 생각을 하지요. 그러면서도 어떤 이론적 논쟁이 아무래도 개방적입니다. PD계열 같은 경우. 그래서 여러 혁명가들의 이론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하면서 NL 보고 공부 좀 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도 이야기했을 정도로 PD도 NL이 김일성을 추종하는 어떤 그런 그룹이다 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고, 그렇지만 그거를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고 하지 않을 뿐이지요. 그 자체가 지금 현재 당장에 실익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선거 때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는 평소에 하지 않고 기본적인 노선에 따라서 계급투쟁을 앞세울 거냐 반미투쟁을 먼저 할 거냐 이런 식의 얘기들로 주로 논쟁을 했었지요. 그렇지만 서로 알고 있었고 마지막 순간에 필요할 때는 상대방을 주사파다 이렇게 공격을 하기도 했다는 겁니다.

    민노당 시절인 2006년 최초로 종북 논란이 벌어지고 또 1차 분당이 벌어진 사항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고 있지요? 

    = 예.

    총학생회장 선거 운동할 때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 그때와 같은 모습이지요. 그게 대중적으로 좀 더 드러났다, 그러니까 선거 때나 그렇게 나타났던 모습이 일반 대중들 앞에서 그렇게 좀 나타났다 이렇게 보이더라구요.

    고려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NL 합법정당 건설 운동’ 주장한 바 있습니까?

    = 예, 그렇습니다.

    내용을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 제가 선거에 나왔었던 1996년도가 학생회 선거에서 처음으로 NL계열이 정당을 건설하자 이렇게 이야기했던 때입니다. 그때 당시 슬로건은 현대적 국민정당이었습니다. 자민통에 근거한 자주, 민주, 통일 투쟁에 근거한 현대적 국민정당을 우리도 건설하자 이런 겁니다.

    앞서 제가 NL, PD의 차이를 얘기드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NL 내에서도 이 합법정당과 관련된 얘기가 90년대 들어와서는 조금씩 조금씩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도 그런 지령을 비슷하게 줬다라고 들었고요. 그리고 실제 제가 받은 북한의 직접 지령은 아니지만 비밀지하 문건 속에서 합법정당을 건설하자라는 얘기가 나왔던 거지요. 그렇지만 NL 내에서 그때는 논쟁이 되었습니다. 왜 논쟁이 되었느냐 하면 NL내에서 그때 당시로는 약간의 그런 게 있었습니다. 어떤 당을 하자 라고 하는 사람들이 좀 혁명성을 잃어가는 것 아니냐, 기본적으로 대중에 입각해서 전민항쟁노선을 내세우고 있는 NL계열에서는 어떤 당을 하자, 정치를 하자, 뭔가 좀 이렇게 변색되는 것 아니냐 이런 의심이 약간 있었습니다. 이거는 다른 논쟁과, 주로 통일운동과 관련된 논쟁으로 이어져서 이런 부분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학생운동 내에서는, NL 주류는 여전히 전민항쟁노선에 따라서 전민항쟁, 대중 투쟁의 대표체인 ‘민족민주전선체’를 강화하는 것을 앞세웠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저와 같이 했던 사람들은 그것도 맞다, 그렇지만 보다 넓은 중간층을 포괄하고 그리고 변화하는 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합법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되지 않겠냐, 그래서 우리도 그거와 함께 동시에 합법공간을 열어가는 차원에서 정당 운동도 함께 전개해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 문제제기를 하게 된 겁니다. 그런 문제제기가 바로 학생 진영에서는 제가 총학생회 선거 나왔을 때 최초로 이루어졌습니다.

    ‘군자산의 약속’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십니까? 

    = 예,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 저는 이 문건을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서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건이 있다는 것을 들었고요. 그래서 인터넷에 쳐보니까 그냥 막 돌아다니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쉽게 입수해서 읽어봤습니다.

    군자산의 약속과 관련 아시는 부분에 대해서 한 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이 군자산의 약속이 2001년도 9월에 나왔습니다. ‘9월 테제’라고 해서요. 저는 이 군자산의 약속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역시’ 하면서 탄성을 느꼈습니다.  제가 96년도에 총학생회 회장을 했고요, 98년도에 감옥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99년까지 한 1년 반 정도 고민을 했습니다. 이 고민을 정리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또 제2의 방황을 했던 건데요. 그때 주변 동지들과 논쟁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2000년, 2001년으로 넘어가는데요. 그 2001년에 나온 이 문건이 말하자면 제가 앞서 설명드렸던 NL계열 내에서의 그런 논쟁을 완전히 정리한, 그것을 보여주는 문건이다 라고 하는 것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NL계열이 가지고 있었던 그 전의 좌우편향을, 서로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던, 한쪽은 우편향이라 그러고 한쪽은 좌편향이라고 그랬던 그런 것을 반성을 하고 우리가 그야말로 두 가지 노선을 다 같이 결합해서, 알맞게 배합해서 나아가야 된다, 그것이 지금 현재 시대의 요구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의 시련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라고 하는 내용이 이 문건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가 된 거예요, 몇 년 동안. 그렇게 해서 NL계열 전체가 완전히 통일단결을 이룬 거지요. 이런 핵심적인 논쟁에서 완전히 통일단결을 이루면서 이 군자산의 약속이 나오게 된 거지요. 그 앞에 합법정당운동에 먼저 뛰어들었던 사람, 조금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 그런 사람들이 결정적인 어떤 그런 계기를 통해 가지고 통일 단결해서 하나의 목표로 완전히 모이게 된 그런 굉장히 중요한 문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건을 NL계열 내부에서 스스로 또 9월 테제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굉장히 값어치 있는 문건으로 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90년대 NL계열의 주류적 움직임은 그때만 해도 전민항쟁을 강조하다가 2001년에 군자산의 약속으로 대중정당에 뛰어들자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습니까? 군자산의 약속이라고 해서 전민항쟁노선 포기한 거는 아니지요? 여기 한 번 문건을 보시면서 얘기하면, ‘선거투쟁과 대중투쟁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정당’ 그 다음 페이지에 이렇게 내용이 나오는데 한 번 보시면서 전민항쟁노선을 포기했는지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이거는 당연히 아니고 여기에 나와 있으니까 제가 굳이 옮길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증거 자료로 보시면 여기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이 문건에 보면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라고 이야기하거든요.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을 가지고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 정부를 수립하고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자는 겁니다. 당시의 정세 인식을 굉장히 주동적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굉장히 긍정적이고 역동적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6·15선언입니다. 2000년의 6·15선언이 또 NL계열 내부의 논쟁을 정리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을 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여기에 그대로 다 나와 있습니다.

    이 6·15선언을 통해, 합법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더 주동적으로 이 한국 사회의 변혁 운동을 전개해가는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정세를 적극적으로 활용을 해서 그야말로 정말 어떤 혁명가적인 철저한 계획 수립 하에 더 높은 신념과 열정을 가지고 이 문제에 뛰어 들자 라고 하면서 정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민항쟁과 대중투쟁을 그야말로 더 잘 할 수 있기 위해서 합법정당운동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살펴보시면.

    그러면서 동일선상에서 알맞게 배합해나가자 그러면서 대중적으로는 합법정당을 앞세워서 합법정당을 가지고, 이 정당에 가입하고자 하는 이런 사람들 중간층이 얼마나 많냐, 그런 사람들을 진보운동이라는 큰 테두리 속에서 이 민족민주정당으로 완전히 끌어들이자는 것입니다. 그런 열의와 결의가 그대로 묻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료를 살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아래에 해당 자료의 내용 일부를 그대로 인용한다. 자료 안에서 ‘전민항쟁’을 포기한 것이 아님을, 오히려 전민항쟁의 변함없는 의의를 확인하며 대중 투쟁과 정당 운동을 알맞게 위치지우고 결합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각계각층 대중조직에 기반하고 민족민주전선에 복무하는 정당

    우리가 건설할 민족민주정당은 각계각층 대중조직에 기반하고 민족민주전선에 복무하는 정당이다.
    합법적 공간이 확대되고 민주주의가 강화되고 있다고는 하나 식민지배체 제가 엄존하고 있고 민중의 기본권이 여전히 유린되고 있는 한국상황에서 합법적인 정당만으로는 광범위한 민중을 변혁역량으로 묶어 세울 수 없다.
    변혁운동의 승리는 궁극적으로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민중의 힘이 지배권력을 압도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지켜진다.

    (중략)

    광범위한 민중을 조직적으로 결속하기 위해서는 각계각층 대중조직을 광범위하게 건설하고 이를 더욱 전투화, 변혁화하는 가운데 이를 자주, 민주, 통일을 과제로 한 민족민주전선체로 결집해야 한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민족민주전선체는 변혁역량의 조직화에서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방향이다. 민중의 민족민주정당은 민족민주전선체에 결합하여 민족민주전선의 강화에 복무 하는 것과 함께 민족민주전선체의 정치적 부대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민족민주전선체에 튼튼히 기반하고 민족민주전선의 강화에 복무할 때 민중의 정치적 지향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다.

    (중략)

    선거투쟁과 대중투쟁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정당

    외세의 지배와 간섭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반민주적 질서가 온존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순전히 의회전술과 선거를 통해 집권을 실현하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대중투쟁은 정세가 아무리 바뀌고 사회가 변한다할지라도 여전히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관철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대중의식화 조직화의 기본방도이다. 전민중적 항쟁은 소수 몇몇 사람이 아니라 압도적 다수민중의 힘으로 지배권력을 포위 고립하여 민중 중심의 정치권력을 세우는 가장 기본적이고 위력적인 방도이다.

    2012년 8월에 쓴 칼럼에 ‘통진당의 주사파는 위축될까’라는 칼럼이 있더라고요. 거기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96년의 연대사태를 언급하면서 16년이 지난 주사파 세력은 더욱 강고해져서 합법공간까지 진출을 했다 라고 쓰신 바 있는데 그 의미는 어떻게 됩니까?

    = 저는 제가 1996년 연대사태로 구속이 되어서 그때 당시의 상황과 오버랩을 시켜서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그때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연대사태는 현재 통진당의 위기 상황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주사파에 있어서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그때 한 달 내도록 9시 뉴스에 한총련에 대해서 보도가 되었지 않습니까? 그 연대사태 이후에 조직적으로도 손실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더 컸지요. 그런데 그런 상황을 이 NL 주사파 그룹이 극복을 했다는 것입니다. 달라진 정세가 또 주효하게 작용을 했지요.

    한총련이 이적단체가 되고 범민련도 이적단체 되고 해서 한총련 운동이, 한총련 학생회가 굉장히 위축이 되었습니다. 대의원까지 구속 대상이 되었으니까요. 그전에는 총학생회장도 구속 안 되었습니다. 연대사태 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대학의 총학생회장이 구속되어도 집행유예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연대사태 때 기본이 집행유예고 실형이었습니다. 그렇게 엄혹했습니다 말 그대로. 많이 잡아가기도 했었고요. 그런데 이 상황을 극복을 한 겁니다.

    그 달라진 정세 속에서 움츠렸지요. 그런데 이후 정세가 다시 바뀌면서 이적단체 규정 해도 이제 안잡아가게 됐습니다. 이적단체 규정만 남아 있는 겁니다. 다시 학생회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제가 최근에 문제시 되는 21세기 대학생연합이라고 하는 대학생 조직의 홈페이지도 자주 들어가 봤습니다. 보니까 제가 활동하던 당시와 학생운동은 50분의 1에서 30분의 1정도 축소가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쭉 살펴보니까요. 어떤 대중 동력 차원에서도 그렇고 여러 가지 면에서 제가 볼 때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렇게 학생운동은 지금 분명히 쇠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80년대, 90년대가 만들어낸 그 주사파 활동가들 다 어디로 갔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90년대 때 한국 사회 시민운동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수많은 대중부문단체에 들어가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런 조직들이 이제는 자생적으로 주사파를 양산할 수 있게 된 거지요. 학생운동 아니면 주사파가 나올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사회운동 조직 내에서 스스로 주사파를 양산할 수 있는 어떤 그런 역량을 가지게 된 거지요. 그것이 2000년대에 꽃을 피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민족민주전선 그리고 합법정당 이것과 결합이 되면서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게 된 거지요. 그래서 10년 동안, 정말 3년의 계획을 가지고 민주노동당을 NL계열이 장악을 했습니다. 그리고 10년의 전망을 가지고 야권연대지만 정권을 잡을 뻔한 그 목전까지 갔지 않습니까?

    저는 이 NL그룹이, 제가 떨어져 나왔지만, 제가 토론과 논쟁을 했던 그 사람들이지만 그때도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고 지금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 대단한 사람들이 정말 그 10년 동안 대단한 일을 했구나. 저는 그렇게 봤습니다.

    2012년 5월 14일 칼럼을 보면 ‘현재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들이 증인과 함께 NL 주사파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고, 더 깊게는 NL 내 몇 가지 분화된 노선 중에서 같은 노선을 취했던 사람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말씀을 해 주시겠어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지? 몇 가지 분화된 노선이라고 했는데 그 NL 내 과거의 세부 노선은 무엇이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크게 보면, 제가 아까 NL 내에서도 합법정당 문제와 관련해 제가 총학생회 선거에 나올 때 그렇게 차이가 있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당시에 학생운동 내에서는 저는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총련 의장 나와서 안됐지요. 당시 지하당이었던 민혁당 계열이 사회적으로는 컸지만 학생 운동 내에서는 소수였거든요. 이 민혁당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학생운동 그룹이 전북 지역과 서울 지역 일부와 경기동부 였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의 민혁당 그룹의 학생운동 세력이 그대로 쭉 간 거지요.

    그러니까 전북지역은 전북지역 자체가 이 민혁당의 수장이었던 김영환씨가 직접 관리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바꾸었습니다. 바꾸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지역은 학생운동은 바로 그 지역이었고요, 사회운동은 울산, 광주, 부산까지 민혁당의 조직을 책임졌던 사람이 장악을 하고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민혁당에 남은, 그러니까 민혁당이 해체를 하면서 북한 인권 운동으로 전환을 할 때에 남은 사람들이 지금 현재 통진당의 중심세력이 된 거지요. 그리고 거기서 저는 서울 지역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고려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보면 다수가 변하지 않는, 민혁당의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김영환씨를 중심으로 민혁당을 해산하고 바뀌어가는 사람들을 변절자라고 얘기했던 그런 사람들이 다수인 그런 상황에서 고민을 했었고요.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 같이 토론했던 그런 사람들이 지금 현재 통합진보당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혁당 말씀하셨는데, 민혁당 하부조직 활동을 하신 적이 있어요? 

    = 저는 학교 단위에서 핵심 활동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 단위의 각 대학마다 또 활동가 조직이 있습니다. 저희 학교에도 구국선봉대 청년이라고 하는 활동가 조직이 있었습니다. 민혁당에서 내리는 문건으로 당시에 ‘빛’이라고 하는 비밀지하문건이 있었습니다. 그 문건을 받아 활조 단위에서 토론하고 학습하고 했습니다. 이 활동가 조직 위에 뭔가 어떤 조직이 있다, 그 위에 어떤 조직이 있고 북한의 지령을 받고 지도에 따라서 활동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충분히 인지를 하고 있지요.

    그러면 구국선봉대 청년 활동을 하셨다는 말씀이지요? 

    = 예.

    그게 무슨 성격인지 조금만 간략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민혁당 관련해서. 

    = 그게 말그대로 학교 단위의 활동가 조직입니다. 이 활동가 조직은 학교 단위에서도 비밀지하 조직인데요. 그러니까 일반 운동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주사파로서 결의를 한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비밀지하조직입니다. 이거는 드러나면 안 되는 것이거든요. 그런 결의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사람들만 모인 그런 비밀지하조직입니다.

    그런데 이게 제가 활동하던 1995년, 96년 당시에 저희는 어떻게 인식을 했냐 하면, 합법 정당 운동을 그때 제기했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 당시에 정세 분위기를 비교적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인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동적으로 나아갈 것에 대한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존에 활동가 조직을 해산을 하고 반합법 조직으로 전환을 했습니다. 반합법조직으로 전환을 하면서 이런 활동가 조직 자체가 대중에게 공개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법적으로 따지면 불법 조직이 되는 거예요. 잡혀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중들로부터 비호받을 수 있다, 대중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런 것들이 청년이라고 하는 조직의 이름을 통해서 나가는데 학우 대중들이 공감하지 않냐, 그러면서 우리가 정권에 저항을 했을 때 학우들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 이런 인식으로, 그러면서 더욱 더 적극적으로 주체사상에 입각한 자민통 투쟁을 벌여나가는 거지요.

    자민통 투쟁을 합법화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자민통 투쟁을 더 합법 공간에서, 더욱 더 적극적으로 벌여나가는 게 이게 기본적인 방향이거든요. 그럴 수 있는 어떤 일정한 정세 그리고 그 정세를 더욱 더 역동적으로 이용해서 그렇게 치고 나가야 된다는 그런 문제의식이 있었지요. 그래서 그런 청년이라는 조직을 반합법조직으로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까 약간은 결의가 떨어지는 그런 사람들도, 완전히 주사파는 아니지만 그전에 활조에 비해서는 아니지만 많이 인입을 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말씀하신 것 보면 민혁당 지역 전북, 서울, 경기동부 이렇게 있었고 증인과 함께 NL 주사파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주로 서울 경기동부 이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 예.

    그러면 같은 노선을 취했던 그 사람들이 현재 통합진보당의 당권을 잡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실명을 말씀은 안하셨거든요.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라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 민혁당 활동했던 선배들로부터 들었습니다. 민혁당의 핵심 당직자들, 많이 언론에 나왔지 않습니까? 비례대표의원으로 이석기는 물론이거니와 장원섭이라든지 우위영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들었고, 그런 사람이 당직자로서 핵심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은 부정경선 문제로 통진당 사태가 불거졌을 때 이름이 거론되거나 그러진 않더라구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번에 지방자치선거에 대거 뛰어 들더라구요. 제가 사실 실명을 얘기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청구인 측에도 양해를 구해서 그것만큼은 안할 수 없겠냐 이렇게 얘기를 해서 실명을 이야기하지는 않는 것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판결문을 보시면 다 나옵니다. 그런 정도에서 이해를 해 주신다면 제가 이 정도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기억은 다 나시지요, 누구누구라는 거. 통진당 당직자 현재 있고 그런 분들이 누구라는 것은 알고는 계시는 거죠?

    = 예, 알고 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서 사실 얘기하기가 많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통진당에 활동하고 있는 과거의 동지들도 문제지만,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의 현재 사회에 나와 있는 층위가 굉장히 다양하거든요. 제가 증인으로 나오는 거 봤을 때 그 사람들 거부감부터 가질 겁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생각을 바꾸게 하고 하는 걸 생각하면 역효과일 수도 있지요. 그래서 고민이 많이 들었습니다.

    전향한 경위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제가 98년도 3월 달에 나왔을 때 첫 번째는 북한의 현실이었습니다. 북한에서 탈북자들이 대거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탈북자들의 수기가 있었지만 아시다시피 간헐적이었고 그 수기들이 안기부 조작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크게 관심을 안 두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그냥 지나가게  됐지요. 그런데 그때 당시에 탈북자들이 수십만명이 중국으로 넘어갔지 않습니까, 그게 언론을 통해서도 나왔고 그리고 수십명, 점점 수백명이 한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90년대 말, 2000년대 초에는 한 해 천명이 넘었고 2천명이 넘거나 육박했던 적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들이 중국에 있다가 이렇게 넘어온 거거든요. 그 사실을 듣고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탈북자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제가 듣고 확인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을 해서 당시에 시중에 나온 탈북자들의 수기는 제가 웬만하면 다 구해서 읽어봤습니다. 그리고 직접 탈북자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요. 그래도 사람이 생각이 바뀐다는 게, 그 순간에 어떻게 생각해야 될지 정말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탈북자들 만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집에 돌아와서 생각하면 눈물밖에 흐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학교에 가서 동지들을 만나면 또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동지들과 토론하고 논쟁을 했었고, 당시에 동지들은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일고의 가치도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민혁당의 해체라고 하는 것을 제가 알게 됐고요. 그 다음에 황장엽씨가 97년도 2월에 한국에 왔지 않습니까, 그때 주체사상에 대해서 황장엽씨가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황장엽씨가 주체사상을 사상적으로는 내가 만들었다, 그런데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에 의해서 수령절대주의 이데올로기로 변질이 됐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지요. 그래서 저는 그 황장엽씨의 이야기도 찾아서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황장엽씨를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저는 최종적으로 생각을 바꾸게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서 증언하고 언론 등을 통해서 실상 접하는데도 아직까지 주사파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는 건데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 그것은 사실 제가 직접 겪었기 때문에 제 경험으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데요. 저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놀라운 게 그 운동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운동을 정리한 사람들도 그렇게 반발을 한다는 겁니다. 제가 조금만 북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 이렇게 던졌을 때 그 반발이 컸습니다. 그야말로 어떻게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냐 하고 심하게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반발을 제가 겪으면서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우상인가? 동굴의 우상 아시겠지만 동굴 안에서는 실체가 그림자거든요. 그림자가 실체다 라고 알고 살아가는 거지요. 그런데 누군가 한 사람이 동굴 밖으로 나왔어요. 나와서 보니까 실체가 따로 있는 거죠. 자기의 모습을 본거지요. 그래서 동굴 안에 들어가서 ‘야, 밖에 나가보니까 실체가 이 그림자가 아니더라, 나가자’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 못 나옵니까? 나왔을 때, 눈을 떴을 때에 그 태양이 내뿜는 햇볕이 감당이 안 되거든요. 그 햇볕의  눈부심을 순간 이겨내야 됩니다. 그래야 눈이 뜨이는 거거든요. 그게 안 되더라구요. 제가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한 번 이야기를 해 보자 라고 해도 그게 안 되더구요. 그래서 이게 이런 문제인가? 하는 생각을 스스로 했습니다.

    정말 그런 문제입니다. 정면으로 대응해서 내가 눈을, 강렬한 햇볕 앞에서 번쩍 뜨고 직시를 해야 됩니다. 응전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결심하고 한 걸음 더 떼야 되거든요. 그러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걸음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저는 그거를 느끼게 됐고요. 그 외에도 주사파들이 왜 생각이 바뀌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제가 많이 얘기할 수 있는데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실제로 경험을 하면서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그들이 생각이 바뀌기 어렵다, 그렇게 아셨다, 그런 취지로 말씀하신 거지요?

    = 조금만 더 얘기드리면 저는 솔직히 그때 변했어야 됐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 처절한 북한의 현장을 외면했거든요. 그때의 논리들이, 한국에도 한 해 이민가는 사람이 십만 명이나 되는데... 이런 이야기라든지 탈북자가 한 순간에 있을 수도 있지... 과장됐다, 많이 잡아야 20만명 굶어 죽었다더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0만명도 적은 숫자입니까? 광주에서 2천명이 죽었다고 우리가 알고 그 피눈물을 가지고 10년 동안 투쟁을 하고 민주화를 이룬 거거든요.

    그런데도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관성에 그냥 놓여 있는 것입니다. 결국에 이거는 죽음의 길입니다. 제가 동지들 하고 달리 가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저는 죽음의 길이고요, 저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죽음의 길입니다. 결국 북한 정권과 운명을 같이 할 거냐, 이거 거든요. 북한 정권에 등을 돌리는 순간, 제가 북한 정권은 독재정권이다 이렇게 규정을 하고 결심을 하는 순간, 그래서 거기에 저항하는 것이 맞다 라고 제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 동지들과는 적이 되는 거거든요. 그리고 동지들도 역시 저에게 적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북한의 김정일 정권 무너트려야 되거든요. 북한 동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반대로 그들은 그런 정권과 공범자거든요. 그러면 피할 수 없는 벼랑 끝에서 마주보는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너는 안기부와 같은 길을 갈 거냐, 조선일보와 같은 길을 갈거냐 이런 이야기를 하고,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이게 혁명가의 관점인가, 눈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저는 통진당의 주사파 세력이 북한의 현실을 모를까 솔직히 의문이 듭니다. 알고도 외면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정치도덕성’을 잃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가가 정말 혁명가다우려면 가장 중요한 게 정치도덕적 양심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정말 혁명가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한 번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증인이 보시기에 주사파 NL 세력이 약화되었습니까, 세력이 약회되었다면 위험하지 않은 건지 그 점에 대해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 글쎄요, 핵심적인 주사파 숫자로 보면 80년대, 90년대 보다는 숫자가 줄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한번 되물어 보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 중에 감옥 갈 각오 하고 자신의 사명에 따라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좀 외람된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들 감옥 갈 각오 하고 한반도 이남에서 혁명 운동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말 희생하는 사람들이고 헌신하는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이 5백명, 천 명 대한민국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글쎄요, 어떨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 사실 봤지 않습니까. 통진당의 몇 명 안 되는 의원들이 어떻게 했는지. 국회에서 최루탄 터트리고 야권 연대 하면서, 제가 이런 얘기 하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야권 연대하고 나서 제일 먼저 야당이 달려간 곳이, 미 대사관 앞에 가서 한미FTA 자신들이 다수당이 되면 폐기하겠다는 거였습니다. 시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사실은 한미FTA 먼저 발의한 사람들이잖아요, 사실은. 왜 이렇게 됐습니까? 한국 사회에서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이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주도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강경 세력의 발언, 이것이 대중들의 흐름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는 거거든요. 그 뿐만이 아니지요. 필요하면 제가 더 얘기를 드리겠습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