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1일 오피니언면 '광화문에서'에 김창혁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나라당에 18대 총선 공천 신청자가 너무 몰려 번호표까지 나눠 줬다는 보도를 보면서 문득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이 생각났다. 다산(茶山) 연구로 유명한 박 원장의 두 번째 직업은 국회의원이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평민당, 민주당 후보로 13대, 14대 총선에 연거푸 당선됐으나 1996년 15대 때는 떨어졌다. 정계에 복귀한 DJ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듬해인 것 같다. 마포의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그가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반색을 하며 역삼동 가는 길을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의 손엔 때 묻은 버스 토큰 2개가 쥐어져 있었다. 아마 노무현, 유인태, 김원웅, 박계동, 원혜영 전 의원과 함께 개업한 음식점 ‘하로동선(夏爐冬扇)’에 가는 길인 듯했다. 하로동선은 그들의 새로운 정치자금 모금 실험장이었다. 토큰을 보는 순간 마음이 짠했다. ‘명색이 재선 의원을 지냈는데…’ ‘누구보다 좋은 국회의원이었는데…’ 하는 생각이 연이어 스쳐갔다.

    세월이 흘러도 그때 그 장면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아마 국회의원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었으리라. 말이 국민과 지역구민의 심부름꾼이지, 국회의원은 그때나 지금이나 벼슬이다. ‘한 꺼풀만 벗겨 보면 아직도 농경사회’라는 한국에서 국회의원은 새로운 권력 신분의 총아(寵兒)로 선망의 대상이 된 지 오래고 지금도 그렇다. 평생 야당을 하다 3당 합당으로 노태우 정부 때 정무 제1장관에 임명된 최형우 의원은 동료 장관들에게 “장관 자리가 좋긴 한데 그래도 국회의원이 역시 최고야”라고 털어놨다는 얘기도 있다. 장관도 야단칠 수 있는 벼슬이지만, 장관처럼 격무도 없고 책임도 없는 국회의원이 훨씬 낫다는 체험담이지 않았을까? 필자 역시 그런 눈으로 국회의원을 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랬기에 그 토큰이 그렇게 짠하게 보였을 것이다.

    한나라당 공천 경쟁률이 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업인, 법조인, 대학교수, 언론인 등 전문직 출신이 절반이나 된다고 한다. 직업정치인의 구(舊)시대가 가고, 전문직 국회의원의 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거창한 분석도 눈에 띈다. 특히 기업인 러시를 두고 ‘MB(이명박) 효과’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변화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국회의원이 이젠 벼슬이 아니라 전문직들이 선호하는 ‘직업’으로 대중화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좋은 일이다. 벼슬보다는 직업으로서의 국회의원이 훨씬 국민 친화적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선거 제도 때문이다. 한 선거구에서 국회의원 한 명을 뽑는 현행 소선거구제는 특성상 ‘죽기 살기’식 선거가 되기 쉽다. 선거가 힘든 만큼 당선자의 ‘전승(戰勝) 의식’이 강해지고, ‘어떻게 선출된 자리인데…’ 하는 생각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국회의원이라는 직업은 다시 벼슬이 되고 만다.

    소선거구제의 폐단은 이뿐 아니다. 사실 13대 국회(1988년)에서 소선거구제가 부활한 이유도 노태우(대구·경북), 김영삼(부산·경남), 김대중(호남), 김종필(충청)의 지역패권 전략 때문이었다. 이젠 바꿀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