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 @ 미국 트루먼 도서관 
    ▲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 @ 미국 트루먼 도서관 

    1950년 6월25일(미국시간은 6월24일)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을 약속받고 동족을 치는 전면 남침을 해왔을 때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에 휴가차 가 있었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이번 사태는 전면적인 대규모 군사행동이다"라고 보고하자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딘, 그 자식들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저지해야 합니다"
    (Dean, we've got to stop the sons of bitches no matter what")
     
    트루먼은 미국의 첨전을 결정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 결단으로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게 되었고, 지금 4800만 명이 자유와 번영 속에서 살고 있다. 트루먼의 이런 결단은 그가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2차대전 때 미국이 스탈린의 소련을 지원하고 있을 때도 그는 루스벨트나 국무부 고관들처럼 소련과 공산주의에 속지 않았다. 그는 스탈린과 히틀러는 똑 같은 독재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스탈린도 히틀러나 알 카포네 같이 믿을 수 없는 자"라고 했다. 트루먼은 또 히틀러의 나치군대가 소련을 침략하자 "만약 독일이 이기고 있으면 러시아를, 러시아가 이기면 우리는 독일을 지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들끼리 가능한 많이 죽이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1차 세계대전 때 참전했고 소령으로 전역한 뒤에도 주방위군에서 일하면서 예비역 대령까지 올랐던 트루먼은 소련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組暴(갱스터)국가라고 보았다. 
      
    공산주의의 본질에 대해 정확한 시각을 가진 그였기에 스탈린이 2차대전의 여세를 몰아 세계赤化 전략을 추진할 때 단호하게 이를 저지하는 결심을 하고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냉전은 트루먼이 시작한 것이 아니다. 스탈린이 유럽의 점령지를 공산화하고 세계 곳곳에서 정부전복 활동을 벌이자 자유진영을 수호하기 위하여 미국이 나서면서 냉전의 막이 올랐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호국 과정 때 미국의 지도자가 트루먼이었다는 점이 우리를 구했다. 김일성 김정일에 비교하면 스탈린은 양반중에도 상양반이다. 그런 김정일에 대해 "저런 자식은 어떤 경우에도 몰아내야 해"라고 말할 수 있는 신념의 지도자가 한국에서 대통령이 될 때 국민들은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것이고 북한동포들도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지도자의 도덕적 결단은 역사를 움직인다. 
     
    朴대통령은 여러 번 일기와 연설에서 김일성을 '만고역적' '전쟁광' '미친 개'라고 저주했다. 그는 김일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이런 도덕적 우월감이 김일성을 코너로 모는 원동력이었다. 李明博 대통령은 김정일을 향해서 마음속에서라도 '저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트루먼 대통령은 참전 결정으로 한국을 구했지만 擴戰을 거부하고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통일을 막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요사이 학자들의 거의 일치된 견해는 트루먼의 擴戰 거부가 정당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전쟁에선 승리를 대체할 것이 없다“고 했지만 트루먼은 ”전쟁에서 승리의 대체물이 있다. 그것은 평화이다“고 말했다. 1953년의 휴전은 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작품이었다. 이렇게 얻은 평화의 시기에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위대한 지도자, 韓美동맹, 그리고 우수한 민족적 자질을 살려 북한정권을 압도하는 경제적, 정치적 성장을 이룩하였다. 한국은 의지만 있으면 자유통일을 할 수 있는 高地에 올라섰다. 트루먼의 참전 결단, 그리고 한국포기 거부 결단 덕분에 가능했던 번영이다. 
     
    6.25 전쟁에서 미국과 한국이 손잡고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함으로써 자유세계는 많은 것을 얻었다. 일본과 독일의 부흥과 재무장, 대만의 방어, 미국의 본격적인 군비증강 등등. 冷戰이 자유세계의 승리로 끝난 뒤 학자들은 6.25 전쟁의 의미와 트루먼의 역할을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트루먼이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오르는 가장 큰 이유도 한국전쟁에 대한 지휘를 올바르게 했다는 점 덕분이다.
      
    1953년 1월15일 트루먼은 퇴임 직전의 작별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나의 재임기간에 대해서 冷戰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그림자를 드리운 시기라고 기억할 것입니다. 하루도 이런 전면적 투쟁으로 영향을 받지 않고 지낸 날이 없었습니다. 그 배후엔 항상 원자폭탄이란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나의 재임기간을 냉전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 8년간 그 冷戰을 이길 수 있는 進路가 설정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트루먼은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정확하게 규정한 셈이다. 레이건에 의해서 冷戰이 자유세계의 승리로 끝나자 역사가들은 냉전 승리의 전략은 트루먼이 만든 것이란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셜 플랜에 의한 유럽 부흥,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의한 유럽의 집단안보, 트루먼 닥트린에 의한 反共정책, 그리고 한국참전 결정은 냉전승리의 씨앗이었다. 레이건이 성공적인 秋收를 함으로써 트루먼의 위상이 높아진 셈이다. 

    고졸 학력밖에 없는 트루먼은 ‘위대한 성격’으로써 미국 역사상 최고의 국무장관(딘 애치슨)과 국방장관(조지 마셜)을 부렸다. 애치슨은 트루먼을 ‘보스’ ‘강력한 심장을 가진 대장’이라고 불렀다. 마셜은 ‘트루먼의 용기 있는 결단보다도 그의 인간됨이 더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평했다. 
     
    트루먼은 퇴임 후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에 돌아가 도서관을 짓고 회고록을 쓰면서 바쁜 여생을 보냈다. 현실 정치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여가수 마리아 칼라스의 독창회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가 나를 알아보더군”이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트루먼은 88세이던 1972년 12월 26일에 죽었고, 이틀 뒤 고향의 도서관 마당에 묻혔다. 그의 부인은 10년을 더 살았다. 
      
    트루먼은 한국인을 만나면 유달리 따뜻하게 대했다. 유학중인 장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위로해주기도 했다. 1963년 金鍾泌씨가 ‘他意半自意半’의 외유를 하던중 트루먼의 집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金씨에게 “내가 한국을 통일시켜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트루먼은 영국을 원망했다고 한다. 트루먼은 金씨에게 “국민은 호랑이이고 정치인은 사육사이다”고 말했다. 
     
    “사육사가 호랑이에게 밥을 잘 주고 하니 호랑이도 감사할 줄 알고, 안심하고 있다간 잡아 먹히는 수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한국엔 맥아더 동상과 테헤란路는 있으나 트루먼 동상도, 트루먼 이름이 붙은 거리도 없다. 4년 전 친북좌익 세력들이 인천의 맥아더 동상을 부수려 들 때 노무현 대통령도, 이해찬 총리도 맥아더는 물론 트루먼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서 한 마디도 국민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盧 당시 대통령은 “나쁜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는 식으로만 이야기했다. 그는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미군의 참전이 없었더라면 나는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가 한국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해준 사람,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트루먼이라면 과장인가? 우리 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한 외국인의 결단에 의하여 구출되어 유복한 생활을 하게 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