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납득가지 않는 정황 많아… '정치 모략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없다'는 원칙 깨달아야
  • 마냥 납작 엎드려 있는 게 미덕인 시절이다. 4.13 총선을 불과 한달여 앞두고 '공천 경쟁' 중인 정치권에 퍼져 있는 인식이 그렇다.

    들썩들썩했던 필리버스터 정국만 봐도 그렇다. 울며불며 떼쓰고, 노래를 불러가며 악을 써도 떨어질 사람은 공천에서 떨어진다.

    "(공천)될 사람이 떠들다가 떨어지는 경우는 있어도 안될 사람이 떠든다고 되는 경우는 없다."

    원칙 하나로 대권까지 거머쥔 박근혜 대통령이 가져온 우리 정치권의 묵직한 변화다.

    하지만 우리 정치권은 아직 멀었다. '나부터 라도 살아야 겠다'는 절박한 마음 때문인지 여전히 풍파를 일으키고, 논란을 자초해서 모사(謀事)를 부린다.

    새누리당이 최근 겪은 '40人 살생부' 사태가 그렇다. 무엇 하나 고개가 끄덕거려질 개연성 있는 정황이 없다. 주장하는 정두언 의원과 이를 부인하는 김무성 대표만 있다. 기회다 싶은 친박계가 '김무성 사퇴'를 외쳤지만, 이렇다 할 팩트(Fact)도 드러나지 않은 채 유야무야 끝났다.

    여당 대표 김무성은 체면을 팍 구겼고,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에게 꼬리를 내렸다. 실체도 없이 '당대표 사퇴'만 외친 친박계는 유난스럽다는 비아냥과 함께 '총선을 앞두고 당을 뒤엎으려 하느냐'는 비판에 머쓱해졌다.

    빙긋 웃는건 결국 정두언 의원 뿐이다. 친박의 거친 공세 속에서 비박계 주류인 김무성 대표와도 별다른 관계가 없던 정두언 의원이 '공천 살생부' 루머를 전해준 김 모 전 교수를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 ▲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가 사흘째 이어지고 있는 25일 밤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강기정 의원이 무제한 토론을 하던 중 이석현 국회부의장의 격려 발언에 감정이 복받친 듯 발언대 뒤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뉴시스
    ▲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가 사흘째 이어지고 있는 25일 밤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강기정 의원이 무제한 토론을 하던 중 이석현 국회부의장의 격려 발언에 감정이 복받친 듯 발언대 뒤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뉴시스
    의문 1. 청와대에서 살생부를? 그게 왜 김무성에게…

    애시당초 청와대에서 공천 살생부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선뜻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발단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번 사태에서 대뜸 "애꿎은 청와대는 끌어들이지 말라"고 펄쩍 뛰었다. 살생부 유통과정이 어떻든 청와대에서 이 같은 문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비판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될 수 밖게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비선실세' 문건으로 지독히도 고생한 현 정부다. 공천에 대해 청와대가 일언반구라도 하는 순간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집단이다.

    설령 정무수석실을 중심으로 '찌라시'에 가까운 문건이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이 문건이 김무성 대표에게 전달될 일은 없어 보인다. 친박계 한 의원은 "그런 문건을 청와대 만들었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만, 설령 있다해도 그걸 이한구 위원장에게 주지, 왜 김무성 대표에게 줬겠느냐"고 했다.

    산전수전 다 겪고,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옥살이까지 한 정두언 의원이 이를 몰랐다고 보긴 어렵다. 그런 정 의원이 김 모 전 교수의 얘기를 듣고 김무성 대표를 곧장 찾아간 의도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찍힐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의문 2. 김무성, 왜 정두언에 살생부 언급했나

    사태를 가장 키운 핵심적인 대목이다. 정두언 의원이 처음 살생부에 대해 들었다는 김 모 전 교수는 '김무성의 최측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정두언 의원과 더 가까웠던 인물이라고 정치권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김 전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MB)의 인수위 시절부터 당선인 보좌역이었던 정두언 의원과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다. 이후 정두언 의원이 MB와 거리가 멀어지면서 김 전 교수도 같이 멀어졌다.

    그런 인물의 말을 듣고 김무성 대표에게 자초지종을 따진 정두언 의원의 의도도 의심스럽지만, 거기에 맞장구를 쳤다는 김무성 대표의 자질도 의문스럽다.

    살생부의 실체가 공론화 되는 순간 가장 직격탄을 맞을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얘기기 때문이다. 김무성 대표 측근들은 '김 대표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 측근은 "(김무성-정두언)두 사람의 얘기는 당사자들만 알 것"이라면서도 "(김 대표가)그런 얘기가 있다는 말을 한 것 만으로 사태가 눈덩이 처럼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고 했다.

    덕분에 친박계는 보란듯이 김무성 사퇴론까지 들고 나왔고, 긴급 최고위까지 치른 뒤 김 대표가 얻은 것은 구겨진 체면 뿐이었다. 김 대표 측 또다른 측근은 "만약 실제로 청와대발 문서가 있다고 해도, 이는 친박계와 비밀리에 협상해야 할 문제지 누군가에게 공개할 것은 절대 아니다"고 했다.

  • ▲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를 앞두고 김무성 대표와 정두언 의원이 입구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은 ‘현역 의원 40여명 살생부’ 논란과 관련해 상반된 주장을 하며 갈등을 빚어왔다. 정 의원 왼쪽에는 유승민 의원이 있다. ⓒ 조선닷컴
    ▲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를 앞두고 김무성 대표와 정두언 의원이 입구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은 ‘현역 의원 40여명 살생부’ 논란과 관련해 상반된 주장을 하며 갈등을 빚어왔다. 정 의원 왼쪽에는 유승민 의원이 있다. ⓒ 조선닷컴
    의문 3. 정두언은 왜 살생부를 언론에 공개했나

    득을 본 건 결국 정두언 의원 뿐이다.

    '40人 살생부'라고 알려진 명단에는 친박계 주요 인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 공천 과정에서 정두언 의원이 탈락되면 이번 살생부 논란이 다시 재점화될 공산이 크다. 청와대에서 생산한 살생부의 실체가 있었다는 반증으로 비박계나 야당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두언 의원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는 이번 공천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정두언 의원은 지난달 25일 김 전 교수를 만나 살생부 얘기를 들었고, 바로 다음날인 26일 김무성 대표와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곧바로 이를 언론에 공개했다. 27일은 정 의원이 공천심사를 받는 날이었다. 정 의원은 공천심사장에서도 이한구 위원장과 단둘이 만나 살생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정두언 의원의 의도를 알 수 없지만, 본인의 발언 기회가 많았고, 파급력도 극대화되는 시점을 노린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 ▲ 지난달 16일 테러방지법 통과를 호소하는 국회 시정연설 중인 박근혜 대통령 ⓒ 뉴데일리 이종현 사진기자
    ▲ 지난달 16일 테러방지법 통과를 호소하는 국회 시정연설 중인 박근혜 대통령 ⓒ 뉴데일리 이종현 사진기자
    결국 당내 상처만 남기고 김무성의 사과로 일단락됐지만, 이번 파문이 의미하는 바는 작지 않다. 과거 우리 정치권에서 횡행했던 '권력에 탄압받고 있다'는 피해자 코스프레 정치가 여전히 잔존하는 게 아니냐는 국민적 우려가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태에 대한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의 일침은 뼈아프다. 이한구 공관위원장은 "3김 시대 음모정치의 곰팡이 냄새가 많이 난다"고 했다. 누가 어떤 음모를 가지고 어떤 정치공작을 했든 떼를 쓰고, 악다구니를 벌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번 사태 당사자들은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