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敵의 약속을 믿은 지도자의 운명
    오사카성(大阪城) 전투 이야기

    김필재   
  • ▲ 거대한 오사카성(大阪城)의 모습/사진촬영: 김필재
    ▲ 거대한 오사카성(大阪城)의 모습/사진촬영: 김필재
    日本의 오사카성(大阪城)은 豊臣秀吉이 天下統一의 근거지로 삼고자 15년의 세월에 걸쳐 축성한 難攻不落의 요새로 현재 나고야(名古屋)성, 구마모토(熊本)성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이다.
    오사카성은 20여 미터 높이의 가파른 성벽과 내·외곽의 2중 해자(垓子)로 둘러싸여 있다.
    외곽은 ‘소토보리(外堀)’, 내곽은 ‘우치보리(内堀)’라고 불리는 오사카성의 2중 垓子는
    유사시 敵軍의 공격을 지연·저지·방해하는 인공장애물이다.
    戰國時代 이후 戰爭으로 점철된 일본 역사에서 이 오사카성의 垓子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徳川家康과 豊臣秀頼(도요토미 히데요리, 豊臣秀吉의 아들)가 맞붙은 ‘오사카 여름의 진’(大阪城夏の陣, 1614년 10월~1615년 6월) 전쟁 당시, 徳川 측은 밖에서 오사카 성을 둘러싸고 豊臣 측을 枯死(고사)시키려 했다.
    그러나 거대한 2중 垓子는 徳川군대가 쉽게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에 徳川 측은 지구전을 펼치며 강온양면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즉 秀頼에게 ‘和親’을 제의하면서 지금으로 치면 ‘平和체제’에 합의한 것이다.
  • ▲ 오사카성(大阪城)은 20여 미터 높이의 성벽과 내·외곽의 2중 해자(垓子)로 둘러싸여 있다./촬영: 김필재
    ▲ 오사카성(大阪城)은 20여 미터 높이의 성벽과 내·외곽의 2중 해자(垓子)로 둘러싸여 있다./촬영: 김필재


    당시 徳川이 내건 和親 조건 중 하나는 오사카성의 소토보리를 메우면 자신의 군대를 퇴각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전쟁경험이 전혀 없고 오사카 성 밖에도 나가보지 못하던 秀頼는 이 황당한 조건을 수락하고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徳川은 재빠르게 우치보리까지 메워, 오사카성은 垓子없는 성이 되어버렸다.
    秀頼의 상황판단 능력이 이 정도니, 성안의 사람들은 도저히 戰爭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거대한 垓子가 없는 오사카성은 더 이상 難攻不落이 아니었다.
    뒤늦게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깨달은 秀頼는 결국 割腹(할복)을 함으로써
    20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오사카성의 전투는 敵의 약속만 믿고 지도자와 국민이 ‘거짓평화’ 그리고 ‘대화세력(중립화세력)’을 선택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