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도 아닌 유감 표시, 책임자 소재도 불분명…재발방지 대책도 '글쎄'
  • ▲ 우리 측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북측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남북고위급접촉을 시작하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뉴데일리 사진공동취재단
    ▲ 우리 측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북측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남북고위급접촉을 시작하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뉴데일리 사진공동취재단

    북한과 김정은은 사실상 내준 게 별로 없다. 우리는 별로 얻은 것 없이 그저 원위치로 돌아왔다.

    단순한 '유감' 한마디에 김정은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확성기도 끄고 또다시 질질 끌려가는 협상 테이블로 갈아 탔다. 협상엔 상대방이 있다지만, 이게 뭔가…, 허전하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25일 새벽 2시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남북 고위급 당국자 접촉 결과에 대한 공동보도문을 발표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남북 고위급 당국자 접촉은 이날 0시 55분에 종료됐다. 지난 22일 오후 3시30분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에서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북한 황병서 총정치국장이 협상을 시작한 지 3일 6시간 25분 만이다.


    지난 4일 경기도 파주 GP인근 철책에서 북한이 매설한 목함지뢰로 우리 군 2명의 하사가 평생 다리를 잃고 살아가야 하는 절망을 겪은 뒤 박근혜 정부가 북한과 협상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남과 북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당국회담을 서울 또는 평양에서 빠른 시일 내에 개최하며 앞으로 여러 분야의 대화와 협상을 진행해 나가기로 했다.

    2. 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서 발생한 지뢰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했다. 

    3. 남측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모든 확성기 방송을 8월 25일 12시부터 중단하기로 했다. 

    4. 북측은 준전시상태를 해제하기로 했다. 

    5. 남과 북은 올해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고, 앞으로 계속 하기로 하였으며, 이를 위한 적십자 실무접촉을 9월초에 가지기로 했다.

    6. 남과 북은 다양한 분야에서의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했다.



    4일간의 밤낮없는 남북 협상 끝에 북한이 내놓은 입장은 "남측 군인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가 전부이다.

    '사과'도 아니고 '유감'이다. 아베 일본 총리가 늘 쓰는 속 뒤집어 놓는 말 한마디에 우리 정부는 꽃다운 우리 군 하사 2명의 꿈을 망쳐버린 치욕과 맞바꿨다.

    책임의 소재도 불분명했다. 지뢰도발도 아니라 지뢰폭발로 규정했다. 사건이 아닌 사고라는 얘기다. 누가 어떤 이유로 지뢰를 매설했는지에 대한 것도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 ▲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이러한 내용은 남북 고위급접촉 합의문에는 담기지 못했다. ⓒ뉴데일리 사진공동취재단
    ▲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이러한 내용은 남북 고위급접촉 합의문에는 담기지 못했다. ⓒ뉴데일리 사진공동취재단


    협상 전날인 24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현 사태를 야기한 북한의 지뢰도발을 비롯한 도발행위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북한이 도발상황을 극대화하고 안보의 위협을 가해도 결코 물러설 일이 아니다"라고도 했고 "이런 도발과 불안상황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확실한 사과와 재발방지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하지만 확실한 사과도 없었고 재발방지 약속도 허무했다.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은 기자회견에서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이라는 표현에 재발 방지의 의미가 포괄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유례없는 대북 협상 주도권을 쥔 테이블에서 지나치게 끌려다닌 늬앙스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비정상적인 사태를 규정하는 정확한 요건도 없는데다, 언제든지 북한이 다시 도발할 때 또다시 도발의 비정상성을 규명해야 하는 또다른 협상의 여지를 남긴 셈이다.

    추후 비정상적인 상황 발생→ 확성기 재개→ 다시 협상→ 북한의 유감 표명→ 다시 확성기 끄기라는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돌아갔다.

    박 대통령이 계속 강조한 '도발-협상-보상'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여전히 남긴 것이다.



    ◇ 천재일우 기회 놓치고 계속 끌려갈지도


    이례적인 '대북 갑질'로 시작했던 이번 협상은 국내외 여론이 우리나라로 향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절호의 기회였다.

    1. 이란 핵협상을 타결하고  쿠바와도 수교를 이룬데다 에너지 주도권까지 확보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남은 임기동안 신경 쓸 일은 북한 문제 뿐이었다.

    2.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김정은이 시작한 공포 정치로 북한 내부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3. 이런 북한 내부의 문제는 중국·러시아 등 주변 우호국들과의 관계 악화를 초래했다.

    4. 박 대통령의 대북 정책의 가장 강력했던 지지는 "군복을 다려놨다. 언제든지 불러만 달라"고 외쳤던 국내 여론이었다.

    하지만 초라한 이번 협상으로 김정은은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았고, 우리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

    "국민 여러분의 애국심을 믿고 북한의 도발에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역설했던 박 대통령의 말에 여론은 실망감이 가득하다.

     

  • ▲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이러한 내용은 남북 고위급접촉 합의문에는 담기지 못했다. ⓒ뉴데일리 사진공동취재단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이번 협상에 대해 "사과도 없고 반성문도 없다"고 평가했다.

    또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확성기 방송을 중단한다? 이게 재발방지 약속인가"라며 비판했다.

    김관진 실장이 열심히 설명한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이란 문구에 대해서도 "합의문 어디에도 다신 이런 짓 안하겠단 말이 없다"며 "'한대 더 때리면 앙~하고 울꺼다"로 밖에 해석이 안된다"고 꼬집었다.

    김 의원은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외교라는게 명확하게 결론내리기 어려운 것이고, 북한이 이성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이라면서도 "우리 군인이 평생 장애를 지고 살아야 하는 큰 부상을 입고, 전 국민이 분노했는데 기껏 받아온 대답이 이 정도라는 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대북 전문가인 이동복 전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도 "북한의 구체적 재발 방지에 대한 명시가 없기 때문에 치명적 취약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 전 대표는 '조갑제닷컴'과의 인터뷰에서 "합의문에 북한의 재발 방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며 "이 부분은 사과보다 중요한 부분이다. 재발 방지까지 북한이 약속하도록 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합의문은 100을 목표로 했을 때 절반인 50에서 멈춘 것"이라고 했다.

    이 전 대표는 또 이번 '남과 북이 올해 추석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하기로…했다'는 부분에 대해 "기존의 상봉방식으로는 이산가족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난 사항"이라며 "이 부분은 완전히 후퇴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대표는 특히 "그러나 한 이틀 정도만 더 버텼다면 우리가 원하는 내용으로 보다 진전된 내용이 포함된 합의문을 도출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우리가 북한을 조금 빨리 놔줬다"고 했다.


     

  • ▲ 박근혜 대통령. ⓒ뉴데일리 사진공동취재단
    ▲ 박근혜 대통령. ⓒ뉴데일리 사진공동취재단


    앞으로가 더 문제다.

    합의문 1번에 명시된 빠른 시일내에 개최하는 남북 당국 회담에서는 '5·24 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 등 북한이 원하는 항목만 줄줄이 의제로 등장할 공산이 크다.

    통큰 합의를 이뤄낸 박근혜 정부 입장에서는 북한이 요구하는 조건을 무작정 거부할 명분이 사라졌다.

    유일하게 우리가 얻어낸 '이산가족 상봉'도 판에 박힌 기획상봉의 재판일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합의문 6번에 나온 '남과 북은 다양한 분야에서의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기로 했다'는 것은 북한이 바라는 남북 경제협력 계획에 우리 돈만 퍼붓는 상황으로 말려들어갈까 우려된다.

    이례적인 안보 정국에서 입조심을 하고 있던 야당의 반격도 예상된다. 절호의 기회를 놓친 박근혜 정부가 국정 하반기 정권 교체를 위해 몸을 불사르는 야당의 거센 공격을 막아낼 동력을 다시 찾아낼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