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北韓의 열일곱 가지 '대남(對南) 공산화 전술'

    김일성이 제시한 각종 ‘투쟁형태’에 따른 對南혁명전술은
    남한 국민에 대한 선전-선동의 방편으로 활용되었으며,
    남파 간첩 및 從北세력의 활동 지령의 역할을 하고 있다.


    김필재   

    투쟁형태로 본 북한의 對南전술로는 김일성이 제시한 ▲정치, 경제 투쟁의 배합 ▲합법, 半합법, 非합법 투쟁의 배합 ▲폭력, 非폭력 투쟁의 배합 ▲대규모 소규모 투쟁의 배합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남한 혁명은 남한 인민 자신이 수행해야 한다’는 역설을 전제로 출발한 것이다. 

  • 위 네가지 전술을 세분화하면 지하당 구축전술, 反美자주화 전술, 폭로전술, 평화공존전술, 국군와해전취(戰取)전술, 대화(협상)전술, 중립화 전술, 선거투쟁전술, 테러전술, 게릴라 전술, 무장봉기 전술, 인민전쟁 전술, 용어혼란전술 등이 있다.
    이러한 투쟁형태의 내용과 對南도발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 경제투쟁의 배합전술에서는 임금인상, 노동 조건 개선 등 낮은 형태의 경제투쟁을 확대시킨 뒤, 이를 높은 단계인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면서 反정부투쟁으로 유도시키려는 전술을 의미한다.

    둘째, 합법-非합법 투쟁의 배합전술은 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제시됐으며, 半합법투쟁은 5차 黨대회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半합법투쟁은 기본적으로 非합법투쟁에 속하며 법망의 허점을 이용하는 것인데, 학원 및 노동자 데모, 그리고 간첩이 위장신분 획득 후 투쟁하는 방식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셋째, 폭력-非폭력 투쟁의 배합전술은 1966년 10월 노동자 黨대표자회의에서 제시됐다. 북한은 이에 따라 124군부대를 조직하고 1967년 이후 남한 내에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양민학살, 열차 폭파 등을 자행했다. 非폭력 투쟁은 시위, 罷業(파업), 怠業(태업)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남파 간첩과 從北세력은 항상 사회 저변에서 이 같은 非폭력투쟁을 조장한다. 

    넷째, 대규모-소규모 투쟁의 배합전술은 1968년 9월7일 북한정권창립 20주년 기념보고에서 제시됐다. 1968년 1월21일 청와대습격미수사건과 같은 해 10월의 울진, 삼척 사건 등이 전형적인 대규모 투쟁의 사례이자 무장유격투쟁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김일성이 제시한 각종 ‘투쟁형태’에 따른 對南혁명전술은 남한 국민에 대한 선전-선동의 방편으로 활용되었으며, 남파 간첩 및 從北세력의 활동 지령의 역할을 하고 있다. 

    김필재(조갑제닷컴) spooner1@hanmail.net

    [관련자료] 북한의 '지하당' 구축전술 사례

    김일성은 제2차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발생 1년 뒤인 1975년 6월 초 불가리아를 방문했다. 당시 그는 토도르 지프코프 불가리아 총리와 나눈 非공개 대화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내에 조직된 XX당의 인원 수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남조선의 마르크스당(黨)인 XX당의 인원 수는 약 3천명 가량 된다. XX당은 각지에 중앙조직이 구성되어 있다. XX당원들은 몇 개 공장에 대표를 두고 있지만, 불법화됐으며, 활동이 약화됐다. XX당원들이 (남조선의) 노동자-농민들 속에서 활동케 하고, 공개적인 反박정희 활동을 하게 한 결과 지도부가 와해됐다. 이 때문에 우리는 XX당원들로 하여금 남조선의 합법정당에 참여할 것과 노동자 농민들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킬 것을 지시했다. 남조선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주요세력은 학생들이다. 이들은 대규모 反박정희 데모를 조직화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활발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위 자료는 美정부연구기관인 '우드로윌슨센터'(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는 영문 자료로 불가리아 주재 동독 대사관이 입수한 기밀 정보였다. 독일어 자료의 영문 번역은 '우드로윌슨센터'의 번드 셰퍼연구원이 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