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게릴라에 의해 사망한 김두표 중령 일가족 습격사건
  •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을 다하던 중 사망 했음에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슬픈 죽음이 있다. 1965 10 14일 새벽 1시경벌어진 김두표 중령 일가족 습격사건도 그 중 하나다.

  • ▲ ⓒ 김두표 중령 일가족 습격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 ⓒ 김두표 중령 일가족 습격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고 김두표 중령은 1950 8월에 소위로 임관해서, 사건 당시엔 21사단 65연대 부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능력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장교로 주변의 평판도 아주 좋았다고 한다.

    김중령은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현리 마을에서 근무를 했는데, 그 곳은 휴전선에서 11km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로 부인과 두 딸, 그리고 처형까지 함께 작은 초가집에서 살며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김중령의 집에 들이닥친 괴한들은 처형과 두 딸에게 흉기를 휘두른 뒤, 김중령 부부의 방으로 침입했다. 비명소리에 깨어난 김중령은 들이 닥친 괴한을 주먹을 뻗어 쓰러뜨렸으나, 또 다른 괴한이 쏜 권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부인 서씨는 신고를 하려고 뛰어나가다가 총에 맞아 쓰러졌고, 범인들은 집 뒤쪽 싸리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도주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비명소리가 나고, 소란이 일어나자 김중령 이웃에 사는 연대부관 한홍준 대위가 즉시 달려왔다. 하지만 괴한들은 이미 도주 한 상태였다. 현장은 처참했다. 김중령과 두 딸 그리고 처형 두 명 모두 사망했고, 유일하게 살아 남은 부인도  중상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야 말로 참변이었다.

    한대위는 즉시 군경에 신고하고, 그때까지 생존해있던 둘째 딸 미혜 양과 부인 서정순씨를 춘천 도립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둘째 딸 마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비상사태 발동과 더불어 범인의 뒤를 쫓던 군경은 26일에 휴전선 남쪽 1km 지점에서 범인들의 핏자국을 발견, 범인들이 월북한 것으로 추정했다.

    군당국은 북괴가 전방에 거주하는 군인가족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이 사건을 벌인 것으로 판단하고 대책마련에 나섰지만, 뾰족한 보복 방법은 없었다.

    한편 희생자들의 장례식은 21사단장으로 엄수되었고, 김중령은 대령으로 추서되어 동작동 국립묘지 육군장교동 2번 묘역에 안장되었다.

    김두표 중령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1950 8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자료에 따르면 호국군 간부후보생 출신. 호국군의 폐지(1949년)와 더불어 정규 육군으로 이전된 듯하다. 

    그는 성실한 근무자세와 군인정신을 보여 주었다. 1962년 중령진급, 8사단 10연대 3대대장, 8사단 정훈참모, 21사단 작전참모 등의 보직을 거쳤고, 강원도와 경기도일대의 전방 부대에서 많은 경력을 쌓았은 아까운 인재였다.

    북한의 단기 남파작전의 대상으로 김중령을 선택한 것은 김중령의 거주지가 일정하고, 휴전선까지 거리가 11km에 불과할 정도로 가깝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북한의 '무력 대공세'를 예감케 하는 시발성 사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은 그 후로 10여 년간 끊임없이 '국지적 게릴라전'을 계속하며, 한반도를 '준 전시 상태'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그 흐름은 최대 규모의 게릴라전인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서 최고조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