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보식 칼럼] "간악한 黑心이라 해도 좋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면
    李대통령 최고 업적 될 것
    더이상 세상 사람들은 "철학이 없다" 고비웃지 않을 것

    이인수 박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와이 망명 시절에 양자로 입적됐다. 전주이씨(李氏) 문중의 결정이었다. 대학을 졸업했고, 영어를 할 줄 알고, 미혼이고, 좋은 집안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맞는 사람이었다. 그 운명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 ▲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양자로 입적된 그는 '텅 빈' 이화장(梨花莊)으로 옮겨와 살았다. 그 뒤 하와이로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첫 상봉의 느낌을 이렇게 전했다.

    "사람 운명이라는 게 있는지, 우리는 몇 십년 함께 살아온 부자지간 같았다."

    당시 30세였던 그도 이제 팔순 노인이 됐다.

    "아버님은 쫓겨났음에도 '학생들이 정말 장해. 청년들의 의기가 없으면 나라가 망해'라고 했다. 숨진 학생과 유족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아버님 흉중에 있던 그런 뜻을 전하고 싶었다.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이제 반세기가 지났으니 더 늦출 순 없었다."

    그의 '4·19묘역 참배'는 불발로 끝났다. 묘역 바깥으로 그를 떠밀어낸 4·19 세대도 대부분 백발(白髮)노인이었다. 독재자를 몰아낸 젊은 학도(學徒)들도 세월 속에 늙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월이 늘 인간의 의식을 성숙시키는 것은 아니다.

    이날 현장은 우리가 어릴 적에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어왔던 '용서하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훈계가 비현실적임을 보여주었다. 4·19 단체가 "자꾸 이러면 이승만의 과오에 대한 공청회를 열겠다"고 했을 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승만의 과오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좌파 진영에서 끊임없이 선전해온 효과다.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분단의 원흉', 평생 독립운동을 해왔으나 정부조직에 친일파를 등용한 '친일파', 미국이 감당하기 어려워 제거할 계획까지 세운 인물이었지만 '미제(美帝)의 앞잡이', 3선 개헌을 시도한 독재자…. 선거 때마다 딱벌떼와 백골단이 설쳤고, 4·19 당일에만 경찰의 발사로 186명이 숨졌다.

    이승만이 하야한 뒤 시민들은 탑골공원에 있던 동상을 새끼에 묶어 끌고 다녔다. 남산공원의 동상은 중장비로 잘라냈다. 그는 하와이에 망명한 뒤로 살아서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1965년 하와이의 한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을 때, 국내 신문에서는 '서거(逝去)'가 아닌 '이박사 운명(殞命)'으로 썼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한때 그를 몰아낸 시민들도 거리로 몰려나와 울었다. 국립묘지에 묻히긴 했으나 1970년까지 묘석이 없었다.

    그런 비참한 말로(末路)를 맞았던 그가 대한민국 헌법을 만들고 정부를 세웠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세계에서 가장 단기간에 이뤄낸 우리 성공의 역사에 그가 주춧돌을 놓은 것이다. 혼란한 해방공간에서 그의 존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김씨 부자의 세습독재 치하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승만의 뒤를 이은 후배 대통령들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우호적인 정치세력도 없었다. 어쩌면 "고조선·고구려·통일신라도 대한민국만큼 위대하지 않았다. 오늘의 모든 성취는 이승만 대통령으로 비롯됐다"고 평가한 운동권 출신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유일한지 모른다.

    이승만은 너무 오래 잊혔거나 어둠 속에 있었다. 4·19 이후 끌어내려진 동상은 현재까지도 서울 명륜동의 한 개인 집 마당에 방치돼 있다. 나는 3년 전 '이승만 동상을 찾아서'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지만, 그 뒤에도 바뀐 것은 없다.

    이번 이인수 박사의 4·19 묘역 참배를 놓고, 일부 4·19 세대들은 "이는 광화문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려는 간악한 흑심(黑心)"이라고 비판했다. 간악한 흑심이라고 해도 좋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에서 건국대통령의 동상을 볼 수 있기를 원한다.

    이승만은 더 이상 4·19 세대의 경쟁자가 아니다. 그의 건국이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4·19 세대의 '승리'도 있었다. 그는 순순히 물러남으로써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학습하게 했다. 이승만이나 4·19 세대나 모두가 승자였다.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어떻게 굴러왔는지를 안다면, 젊은 친구들에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가르쳐야 할 소명을 느낀다면, 우리 사회의 어른인 4·19 세대가 이승만 동상 건립에 앞장설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를 추진하면 '임기 내 최고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더 이상 이 대통령에 대해 "철학과 역사적 사명감이 없다"고 비웃지 않게 될 것이다. (조선일보. 2011.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