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충원, 백산 지청천 장군 추모식 지원일생 전체가 독립운동을 위한 기간…광복군 총사령관으로 귀국
  • 국립서울현충원(원장 정진태)은 14일 오전 11시 임시정부 요인묘역 15호에서 ‘광복군동지회’ 주관으로 거행되는 ‘故백산 지청천 장군 54주기 추모식’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백산 지청천 장군은 188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1912년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맡아 독립군을 양성했고 1920년 중·소 국경인 ‘밀산’으로 모여든 독립운동 단체들의 요청으로 독립군단을 조직, 부사령관을 맡았다.

    지청천 장군은 이후 소련 땅에 있던 ‘이만시’로 이동해 1921년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소련정부의 협조를 받아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이후 소련 정부가 고려혁명군의 해산을 요구, 이에 항전하다 체포·투옥된다(자유시 참변). 

    이후 임시정부의 항의로 풀려난 지청천 장군은 1925년 만주에서 정의부를 조직, 일제 기관을 파괴하고 일본 경찰 등을 사살했다. 1930년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자 한국독립당을 창당했고, 1935년에는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39년 10월 사천성 기강에서 열린 의정원 정기의회에서 의정원 의원 및 국무위원으로 선출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국무회의에서 군무장으로 선임되어 입법․행정․군사에 대한 제반사항을 처리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총사령으로 임명되어 1941년 지대를 편성, 중국 중앙군 및 주중 연합군과 함께 항일 투쟁을 하면서, 한국 진입 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제헌의원, 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지청천 장군은 1957년 1월 15일 별세,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처음에는 서울 강북 수유리 소재 애국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4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 15호로 이장됐다.

    지청천 장군이 만주, 중국,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마다 처음에는 그를 지원했던 중국, 소련 정부는 그의 세력이 급격히 강해지는 것에 놀라 사사건건 방해했다. 하지만 지청천 장군은 독립무장운동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국립서울현충원 측은 “금번 행사는 고인의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고, 애족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한 취지에서 마련되었다”며 “현충원은 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나라사랑 정신의 계승발전에 일조하는 관련단체의 추모행사를 지속적으로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날 추모식에는 유가족,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원, 광복회 회원, 추모객 등 7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