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 식민지(植民地) (27)  

     떠나기 전날 밤이니 1912년 3월 25일이다.
    아버님은 평산 누님 댁으로 옮기셨고 아내와도 20년에 걸친 결혼 생활을 정리한 터라 나는 YMCA의 3층 숙소에서 빈껍질처럼 느껴지는 몸으로 앉아 있었다.

    밤 9시 반이 되었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기석과 함께 노석준이 들어섰다. 노석준은 이구치 대좌의 통역으로 기석과 함께 온 것은 처음이다.

    놀란 내가 눈만 크게 떴더니 기석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노석준이 감시원들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이구치의 통역인 노석준의 영향력은 꽤 컸다. 이제 무역상이 된 통역출신 기석과 노석준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사이가 되어있었는데 둘 다 나에 대해서는 충실했다. 그들에게는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도 안중에 없다. 해준만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둘은 앞쪽 의자에 나란히 앉더니 먼저 기석이 입을 열었다.
    「내일 떠나시면 오래 못뵐 것 같아서 이렇게 밤에 뵈러 왔습니다.」

    내가 떠난다는 소문이 퍼져있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2월 초에 윤치오 등이 체포되면서 YMCA도 성역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데다 나와 교분이 있던 인사 대부분이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석이 말을 잇는다.
    「제가 아버님은 편히 모시도록 손을 쓸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주겠는가?」
    정색한 내가 손을 뻗어 기석의 손을 쥐었다.

    남들은 기석이 친일파요, 일본놈 앞잡이라고 하지만 박무익 부하에게 꼬박꼬박 군자금을 보내는 독립운동 후원자이기도 한 것이다.
    밖에서 싸우는 독립군보다 이렇게 이중생활을 하는 인사들이 더 어렵게 산다. 그래서 내가 남아있는 사람들이 더 애국자라고 한 것이다.

    그때 노석준이 말했다.
    「제가 이구치가 작성해 올린 보고서를 읽었는데 선생님이 요주의 인물로 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미국 출국도 금지시키고 잡아 가둬야 된다는 의견도 있었는데 겨우 통과 된 것입니다.」

    나는 쓴웃음만 지었고 노석준의 말이 이어졌다.
    「경시청 당국은 서로 감시를 시키고 인질을 잡거나 함정을 파서 배신을 시킵니다. 이제는 거의 모든 조직, 단체에 밀정이 들어가 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국내의 독립군 활동이 극도로 위축되어 있는 것이다.

    길게 숨을 뱉은 내가 말했다.
    「이 땅에 그대들 같은 사람이 남아있는 한 희망이 끊어지진 않을거요.」
    시선을 내린 내 어깨가 저절로 늘어졌다.

    이제 내일이면 이 땅을 떠나는 것이다.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제 타국을 헤메다가 이름도 모르는 땅에서 숨을 그치게 될 지도 모른다. 처연해진 내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긴 숨과 함게 넘쳐 떨어졌다.

    「이젠 누굴 원망하거나 자책하지도 않겠어.」
    혼잣소리처럼 내가 말을 이었더니 둘은 숙연한 표정으로 듣는다.

    「이 땅이 독립이 되는 날까지 내 마지막 숨을 불어 넣을테니까.」
    손등으로 눈을 닦은 내가 벽을 향하고 말했다.
    「내 나라를 찾으려고 내 나라를 떠나다니. 병든 아비를 두고, 종이 된 동포를 두고 이렇게 떠나야만 하다니.」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외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내 나라를 떠났다.
    귀국한 지 17개월만인 1912년 3월 26일, 내 생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