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 식민지(植民地) (26)

     「형은 총독부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어.」
    주상호(周相鎬)가 나에게 머리까지 저으며 말했다.

    주상호는 나와 황해도 평산 동향이며 배재학당 동창이기도 하고 협성회보도 같이 발행했다. 내가 감옥에서 탈출 할 때도 도움을 주었던 막역한 사이. 한글학자이기도 한 주상호(일명 주시경(周時經))의 애국심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YMCA의 교사 대기실에서 마주보고 앉아있다.
    내가 미네아폴리스행 계획을 말했더니 주상호는 대번에 찬성했다.

    주상호가 말을 잇는다.
    「이미 간도 계획이 탄로 났다면 미국으로 빠져 나가도록 해. 거기에서 만주 땅으로 옮겨갈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상재의 조언을 듣고 먼저 주변부터 정리하려고 아내에게 말했던 것이 갑자기 급류에 휩쓸린 것처럼 되어버렸다.
    마침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리는 감리교 총회가 다가와 있기도 한 것이 질레트와 브로크만 등에게 나를 빼돌릴 구실을 만들어 준 것이다.

    내가 주시경에게 물었다.
    「시경이, 내가 떠나면 우린 독립이 된 후에나 만날 수 있겠지?」
    「그렇지.」
    쓴웃음을 지은 주시경이 머리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3월의 밝은 햇살이 비치는 오전이다. 복도에서 학생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마당에서는 함성이 일어났다. 둘러서서 공놀이를 하는 것이다.

    「우린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다.」
    내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더니 주시경도 길게 숨을 뱉는다.
    「이렇게 세월이 가면 조선 땅이 영영 일본놈 영토로 굳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를 눌렀지만 오래 가지는 못할꺼야. 조선도 그들과 합세해서 싸워야지.」
    「그럼 형은 간도 땅으로 들어갈거야?」
    「먼저 미국에 들렸다가.」

    다시 가슴이 답답해진 내가 주시경을 보았다.
    「태산이 어머니하고는 이혼하고 나가겠다. 하지만 아버님이 병중이시라 뵐 면목이 없구나.」

    아버지는 누님한테 부탁해야겠지만 이 또한 낯을 들 수가 없는 노릇이다.

    「내가 틈 나는대로 아버님 뵈올테니까 형이나 몸조심 하시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더 애국자다.」
    그러자 주시경이 쓴웃음을 짓는다.
    「글쎄, 다 그렇지는 않을 거요. 형.」

    우리가 대기실을 나왔더니 복도의 걸상에 앉아있던 두 양복쟁이가 일제히 시선을 주었다. 헌병대의 조선인 보조원들이다. 대위의 말처럼 헌병대에서 풀려난 후부터 이렇게 밀착 감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주시경도 YMCA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는 터라 둘은 눈동자만 굴렸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창신동의 본가로 찾아가 아버지를 뵈었다. 내가 온 기척을 듣고도 아내는 방문을 열어 보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곧장 누워계신 아버지 앞에 앉았다.

    「아버님, 제가 닷새 후에 다시 미국으로 떠납니다.」

    옆방의 아내가 귀를 세우고 있을 터라 나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누님께서 아버님을 모셔가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내일쯤 가마꾼이 이곳에 올 것입니다.」
    「응, 떠나느냐?」

    반듯이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또렷하게 말씀을 이었다.
    「그래, 떠나거라. 가서 태산이도 만나봐야지.」
    「아버님, 몸 건강하십시오.」
    했지만 말끝은 떨렸다.

    아버지는 오래 못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