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丁一權만 본 엄청난 文書: 李承晩-맥아더 편지  
     李承晩-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을 예상했다. 그러나 트루먼에게는 알리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趙甲濟   
     
     1950년 10월2일, 중공의 독재자 毛澤東은 朱德(주더·주덕), 주은래, 劉少奇(류샤오치·유소기), 高崗(가오강·고강) 등 수뇌부 회의를 소집하고 韓國戰 참전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많은 간부들이 참전에 반대했다. 미군에 비해 장비가 절대적으로 열세하고 공군의 엄호를 받을 수 없으며 이제 막 내전을 끝내고 국가 건설을 시작한 마당에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란 것이 반론의 요지였다. 毛澤東이 지원군의 총사령관으로 점찍어놓고 있던 林彪(린뱌오·임호)도 아프다면서 반대 뜻을 전해왔다.
     
     이런 반론을 누르고 毛澤東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명분으로 참전을 결심하고 총사령관에는 彭德懷(텅더화이·팽덕회)를 임명했다. 毛澤東은 팽덕회에게 아들 毛岸英(마오안잉·모안영)을 데려가도록 명령했다. 彭德懷는 중국내전 중에 毛澤東의 처와 아들이 피살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양했지만 毛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데려가게 된다(나중에 북한에서 전사).
     
     毛澤東은 압록강을 넘는 날을 10월 15일로 잡았다. 그리고는 주은래 총리를 소련으로 보내 공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이때 겁을 먹고 있었다. 미국이 소련과 정면 대결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중공군 20개 사단의 장비를 제공할 용의는 있지만 공군의 지원은 당분간 불가능하다고 뒤로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이 배신에도 불구하고 毛澤東은 不眠(불면)의 고민을 한 끝에 참전 강행을 결단한다. 압록강 도강은 10월 19일, 제 1波(파)는 25만, 제 2파는 15만, 제 3파는 20만, 총 60만의 대군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전투기와 탱크는 한 대도 없고, 소총과 방망이 수류탄마저 한 명에 하나씩 돌아갈까 말까 한 중공군은 그러나 혁명적 열정과 엄정한 군기로 똘똘 뭉쳐서 육해공의 최신무기로 철갑을 두른 유엔군을 향하여 나아갈 참이었다.
     
     10월 12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와 만나 한반도 전략을 의논하고 싶다고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타진한다. 맥아더는 태평양 상의 웨이크 섬에서 만나자고 제의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체의 3분의 2, 맥아더는 3분의 1을 날아가게 되어 있는 거리였다. 맥아더는 사실상 “나는 바쁘니까 만나고 싶으면 이리로 오시오”라고 한 셈이다. 솔직담백한 성격의 트루먼은 주변의 불평을 누르고 부하를 만나러 태평양을 건너가기로 한다. 회담의 주제는 중공군의 참전 여부에 대한 논의가 될 터였다.
     
     이 무렵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대통령이 보여준 이 편지를 읽어보았다는 丁一權(정일권) 육군 총참모장의 기억에 따르면 요지는 이러했다.
     
     <본직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이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보는 바입니다. 이번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긍정함으로써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상의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은 거족적으로 북진 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英邁(영매)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으니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정일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편지에 대한 맥아더의 답장도 보았다고 한다. 그가 기억한, 10월 13일자 맥아더의 답장 요지는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관의 답장 요지는 이러했다(《정일권 회고록》).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직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넘을 것입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 삼아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에 있어서 데모크라시의 최대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언제까지 본직의 전략을 뒷받침해 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센 반대에 부딪힐 것입니다. 하지만 본직의 불퇴전의 결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면 原爆(원폭)도 不辭(불사)할 것입니다>
     
     정일권(국무총리, 국회의장 역임, 1994년 77세로 작고)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이 주고받은 이 두 통의 私信(사신)을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극비 중의 극비였다. 史家(사가)들이나 비평가들이 이 극비를 알 까닭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비판의 소리, 즉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의 가능성을 오판하여 유엔군의 북조선 철수를 자초했다’는 명예롭지 못한 책임추궁에도 이 비밀 서한만큼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정일권의 이 증언은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중공을 치기 위하여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巷間(항간)의 음모론을 확인해주는 결정적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일권은 육군 총참모장 겸 3군 사령관으로서 맥아더의 전략에 대한 가장 신뢰성 있는 정보원이었다. 성격이 신중하기로 유명했던 그의 이 증언은 다른 자료나 증언들과 비교하여 검증할 때 더욱 신뢰도가 높아진다.
     
     1972년 일본에서 출판된 ‘캐논 기관으로부터의 증언’이란 책이 있다. 저자는 3년 동안 이 부대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延禎(연정). 묵호경비사령관이던 연정 해군소령은 1949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의 추천을 받고 도쿄로 건너가 맥아더 사령부 산하의 첩보부대인 캐논 기관에 소속되었다. 캐논 소령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일본뿐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의 정치·군사 정보 수집을 하고 있던 부대였다.
     
     1950년 10월 캐논 소령의 명령에 따라 연정은 한국 민간인들로 구성된 위스키 부대를 지휘하여 대청도─백령도 등 서해안의 島嶼(도서)를 점령하고 여기서 3~4명을 한 조로 묶은 수십 명의 첩보원들을 大連(다이롄), 旅順(뤼순), 신의주로 침투시켰다. 이 첩보원들 중에는 중국인과 중국어를 잘 하는 한국인들이 끼여 있었다. 14일부터 敵陣에 침투한 첩보원들에게서 ‘중공의 대군이 韓滿(한만)국경에 집결, 남하하여 유엔군에 대항할 기세임’이란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延禎은 이 첩보들을 극동군 사령부의 정보참모인 윌로비 소장 앞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대군이 이동한 흔적─화덕과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있다. 10개 사단 규모로 추정된다’, ‘진행방향은 신의주, 뒤를 쫓고 있음.’ 이런 보고에 이어서 곧 ‘육안으로 중공군 관찰’이란 보고가 들어왔다. 백령도로 귀환한 첩보원들은 남하하는 중공군 대열에 끼어들어 병사들과 대화를 나눈 사람들도 있었다. 첩보원들은 그런 모험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중공군은 여러 지방에서 소집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자기들끼리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더란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군복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그냥 민간인 복장으로 기나긴 대열을 따라가고 있어 거기에 끼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상대가 광동어로 이야기를 걸면 이쪽에서는 북경어로 상대하여 기를 죽이는 방법도 썼다.
     
     “마치 하나의 도시가 이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혀를 내두른 첩보원은 촬영한 필름도 내놓았다. 연정은 더욱 확신을 갖고 윌로비 소장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임표 지휘 하의 10만 대군이 신의주의 對岸(대안) 안동을 향하여 대이동하고 있다. 북한지역으로 남하할 의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은 이 보고 중 林彪 부분은 틀린 정보였다. 임표가 지휘하던 제 4야전군 출신 병사들이 지원군에 많이 들어 있었는데 이들은 팽덕회가 지원군의 새 사령관으로 임명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북한에서 初戰(초전)에 포로가 된 병사들도 ‘임표 부대원’이라고 진술했다. 이 때문에 미군과 한국군은 중공군의 초기 사령관은 임표였던 것으로 오판했다.
     
     미국의 公刊史(공간사)에도 되풀이된 이 오판이 수정된 것은 중공 쪽의 한국전 자료가 공개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였다. 맥아더는 자신이 상대하고 있던 敵將(적장)을 誤認(오인)했다는 뜻이다. 이윽고 북한에 침투시킨 첩보원들로부터 ‘남진한 중공군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첩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정은 일련의 정보를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하면서 맥아더가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10월 15일 태평양상의 작은 섬(웨이크)에서 이상한 정상회담이 열렸다. 맥아더는 낡은 모자를 쓰고 작업복을 입은 채, 그것도 윗단추를 하나 풀어놓은 모습으로 트루먼 대통령을 맞았다. 트루먼은 훗날 측근에게 “내 부하가 만약 그자처럼 옷을 입었더라면 엉덩이를 차버렸을 것이다”고 불평했지만 맥아더 원수의 아내가 좋아한다는 블럼 캔디를 선물로 내놓았다. 공항 내 콘세트 건물 안에서 한 시간 동안 이루어졌던 회담의 終盤(종반)에 트루먼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서 물었다. 맥아더 원수는 단언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전쟁이 터진 첫째 달 혹은 둘째 달에 개입하였더라면 결정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들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모자를 손에 들고 있는 게 아닙니다. 만주에 집결한 30만 병력 중 기껏해야 5만~6만 명 정도가 압록강을 건널 수 있을지 모르지요. 중공군이 만약 평양으로 남진하려고 하면 아마도 역사상 최대의 떼죽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도쿄에 있던 맥아더의 극동군 사령부에서 정보참모로 근무하였던 윌로비 소장은 중공군 개입에 대한 誤判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그는 정보장교론 모든 점에서 부적격자였다. 정보장교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言行을 조심하고, 많은 것을 듣고, 말은 적게 하고, 냉정해야 할 사람인데, 윌로비는 정반대였다. 그는 맥아더 숭배자였다. 맥아더의 생각과 반대되는 정보는 묵살하였다. 그는 엉뚱하게도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숭배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말을 단정적으로 하는 이였다. 부하들의 反論을 허용하지 않았다. 극동군 사령부 관할 지역 안에선 CIA가 활동하지 못하게 한 것도 그였다. 물론 맥아더의 승락을 얻어서 그렇게 하였다. 정보는 여러 채널을 통하여 들어온 것을 지휘관이 종합, 검토하여 판단하도록 해야 하는데 윌로비는 단일 창구를 고집하였다. 그는 프러시아 귀족출신임을 자랑하였는데 조작이란 說도 있다.
     
     미국 CIA는 맥아더의 명령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하고 일본 주둔 美 해군부대나 한국 대사관에 위장된 要人들을 박아 놓았다. 이 要人들은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事前 정보를 많이 입수하였다. 가장 중요한 소스는 중공군에 편입된 舊 장개석 군대였다. 이들중엔 옛날 무전기를 갖고서 몰래 대만의 옛 상관들에게 보고를 하기도 하였다. 한국으로 파병된 중공군 부대 안에도 무전기를 가진 舊 장개석 군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大兵力이 만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알렸다.
     
     CIA 요인들은 이런 정보를 본부로 보냈다. 워싱턴의 국방부, 합참, 국무부, CIA는 별도로 중공군 개입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있었으나 맥아더의 판단에 異見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인천상륙 작전 이후 神格化된 맥아더의 권위에 눌린 것이었다.
     
     丁一權씨가 읽었다는 李承晩-맥아더 편지가 사실이라면 많은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의심하였던 假說이 적중한 셈이다. 그 가설은 이렇게 정리된다.
     
     1. 맥아더의 목표는 공산화된 중국을 수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공을 칠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는 중국 수복을 '십자군 전쟁'이라 표현하였다. 과대망상이기도 하고 종교적 신념이기도 하였다.
     2. 그는 모택동의 중공군이 한반도를 침략하려고 만주에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트루먼 대통령에겐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허위보고하였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개입할 것이다'고 사실대로 보고하면 트루먼이 北進을 중단시켜 중공을 칠 기회를 앗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3. 1950년 10월 하순 北進하는 유엔군을 중공군이 기습, 공격한 뒤 물러나자 맥아더는 수십 만의 대병력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수만 명에 불과하다고 축소 보고하였다. 있는 그대로 보고하면 워싱턴이 北進을 중단시킬 것이라고 염려하였다.
     4.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병력이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린, 1950년 11월 하순의 총공격 명령은 중공군이 깔아놓은 거대한 함정으로 유엔군을 밀어넣은 자살공격이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자 드디어 워싱턴에 자신의 복안을 내어놓는다. 만주폭격, 중공해안 봉쇄, 장개석 군대의 중공 상륙 지원, 한국에 대규모 증원군 파병. 이는 중공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 건의였다.
     5.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을 정면으로 공격하면 소련(당시 核보유)이 참전, 미국이 이길 수 없는 세계大戰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판단, 맥아더의 건의를 거부한다. 이때부터 워싱턴의 국가지도부는 맥아더를 不信하게 된다. 맥아더는 자신의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는 권위와 신뢰성을 상실한다.
     6. 이 맥아더의 대도박에 희생된 것은 한국이다. 맥아더가 압록강까지 北進하지 않고, 평양~원산선에서 멈춘 뒤 진지를 강화하고, 공산측에 휴전을 제의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7.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가 하자는대로 하였더라면 미국은 중공 및 소련을 상대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陸上戰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일본까지 중공과 소련의 공격을 당하였을 것이다. 미국이 졌을 것이고 한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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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때 맥아더가 하자는대로 하였더라면
     가디스 교수: 한반도는 원폭투하장이 되고 제3차대전으로 갔을 것
     趙甲濟
     
      6.25 남침전쟁 때 맥아더는 功보다 過가 더 크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功이 크긴 하지만 중공군 개입 움직임을 알고도 덮어버린 점, 1950년 10월말의 첫번째 중공군 기습을 '정찰활동' 정도로 과소평가하고 한 달 뒤 다시 진격하다가 대반격을 부른 점, 중공군 南進 개시 후 "중국 폭격, 원폭 사용 등 대규모 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한국포기론을 건의한 점 등이다. 유엔군이 압도적 병력으로 개입하였으므로 인천상륙작전이 아니라도 北進은 기정사실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의 原爆 사용 건의를 거절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막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아래 글을 권한다.
     
      <1950년 11월30일 워싱턴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열고 있었다. 중공군은 북한지역에서 총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유엔군은 남쪽으로 총퇴각중이었다.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군사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무슨 조치라도 취할 것이다."
     
      한 기자가 물었다. "원자폭탄의 사용까지 포함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무기를 다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戰線 사령관이 무기의 사용권을 갖고 있습니다. 관례에 따라서."
     
      이틀 뒤, 트루먼 대통령이 위임한대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美 공군에 명령하여 다섯 개의 원자폭탄을 南進하는 중공군을 향해서 투하하도록 했다. 15만 명의 중공군과 공산군에 포로로 잡힌 수 미상의 미군과 한국군 병사가 죽었다. 중공군의 南進은 저지되었다.
     
      유럽의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미국 정부가 자신들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데 대해서 분노했다. 직후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여야 했다. 6개월 전에 있었던 한국방어 유엔결의를 취소시키자는 제안에 동맹국들도 동조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소련은 모택동의 中共으로부터 원자폭탄을 사용하여 보복해달라는 압력을 받았다. 소련이 모택동의 요구를 거절하면 국제공산주의 사회에서 소련의 리더십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다.
     
      소련은 미국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48시간내에 한반도에서 모든 군사적 행동을 중지하든지 '가장 심각한 결과를 각오하라'는 것이었다. 12월4일 時限이 지났다. 두 대의 소련 폭격기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륙했다. 원시적이지만 작동가능한 원자폭탄을 싣고 있었다.
     
      목표는 미군의 보급기지인 인천과 부산항이었다. 원폭이 투하되었다. 약30만 명이 죽었다. 보급기지의 기능은 사라졌다. 맥아더는 즉각 일본에 있던 미군 폭격편대에 대해서 블라디보스톡과 심양, 그리고 하르빈에 原爆을 투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원폭투하가 이뤄지자말자 일본에선 反美데모가 일어났다. 일본은 소련 폭격기의 행동반경 안에 들어 있었다. 영국, 베네룩스 3국, 프랑스는 NATO에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西獨의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 原爆을 투하했다.
     
      물론 위의 글은 사실이 아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기자회견만이 사실이다. 트루먼은 영국 정부 등의 항의를 받고 위의 기자회견 내용도 취소해야 했다. 그는 "한국에서 원자폭탄을 사용할 계획이 없다"고 공언했다.>
     
      위의 글은 동서冷戰史를 다룬 미국 예일대학의 존 루이스 가디스 교수의 '冷戰-새로운 역사'에 실려 있다. 이 책은 냉전을 가장 권위 있게 정리한 名著로 꼽힌다. 미국이 한국전쟁 때 중공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하여 원자폭탄을 썼어야 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假想(가상)이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하자는 대로 하면 제3차 전쟁이 터진다고 생각하여 한반도에서 무승부 전략을 세웠다. 그 뒤 휴전선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어느 체제가 민족을 행복하게 만드느냐"라는 명제를 내건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전쟁에서 남한은 이기고 있으나 내부의 敵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