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 식민지(植民地) ⑰  

     삼천리강산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남의 식민지가 된 산하(山河)였으니 전국을 다니면서도 감개가 일어나지 않는다.

    12월, 내가 귀국한 지도 이제 일년이 넘어 다시 두달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수백회의 지방 강연을 다녔으며 수천명의 신자를 끌어들였지만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의욕을 잃고 좌절했다.

    선교활동을 조국의 독립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그늘에 숨어서 하는 일이라 한계가 있다.

    「저 맑은 눈을 보게.」
    강연을 잠깐 쉰 내가 단하의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은 평양의 서문교회 안이었다. 내 옆에 선 사람은 서순영이었는데 고향인 평양에 나와 함께 들린 셈이다. 서순영이 내 시선을 따라 모여 앉은 1백여명의 학생들을 보았다. 모두 열다섯살 안팎의 소년 소녀들이다.

    「저 애들은 일본인으로 자랍니다.」
    불쑥 대답한 서순영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목소리를 낮춘 서순영이 말을 이었다.
    「학교에서 천황을 숭배하도록 교육을 받고 일본 민족이 조선인보다 우월하다고 배웁니다. 저 애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는 일본인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나는 소리죽여 숨을 뱉았다. 내가 미국 문명과 하느님에 대한 열변을 토한다고 해도 체계적이며 의무적인 일본화 교육을 당해낼 수 있을 것인가? 조선인의 독립에 대한 의식 개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순영이는 7인회가 해체되고 나서 조금 과격해진 것 같구나.」
    「저도 간도 땅으로 가야겠어요.」
    입술만 달삭이며 말했지만 나는 알아들었다.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다시 미국의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이 정도다.

    민주주의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기초 위에서 다수결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따위의 기본 교육. 학생들에게 조선의 전제주의 왕권이 멸망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도 지쳐서 가슴이 아픈 상황이 되었다.

    강의를 마친 내가 숙소로 삼은 YMCA 회관 안채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5시 반쯤 되었다. 12월 초순의 눈발이 흩날리는 추운 날씨였다.

    「선생님, 고종덕씨가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안채의 마룻방으로 나와 앉은 나에게 서순영이 다가와 서서 말했다.

    옆쪽 부엌에서 저녁상을 차리는 중이라 국 냄새가 풍겨왔다.
    긴장한 내 표정을 본 서순영이 시선을 내리고 말을 잇는다.
    「며칠 전에 윤민호씨한테 자기가 따돌림을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다고 했다는데요.」
    「어허.」

    탄식한 내가 서순영에게 물었다.
    「그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해야 되었어. 왜 소홀했나?」

    7인회를 해체 시키고 나서 나는 고종덕을 제외한 나머지 회원들을 따로 불러 내막을 이야기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회원들이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눈치 챈 것 같다.

    마룻방은 옆쪽 부엌의 열기가 전해져서 따뜻했다.
    그러나 서순영은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좁은 학사 내에서 함께 견디다보니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든 서순영이 불빛에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최대진 선생과 양성삼 선생이 고종덕씨를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한다니?」
    되물었던 내가 곧 어깨를 늘어뜨렸다.

    뻔한 일 아니겠는가? 제거한다는 말이다.

    서순영은 외면했고 나도 입을 다물었다.
    이젠 회원끼리 서로 죽이고 죽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