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 식민지(植民地) ⑯  

     오후 7시 반, 11월 하순이었지만 겨울처럼 추운 날씨였다.
    코트 깃을 세운 나는 종로 거리를 걸어 길가의 미곡상 옆쪽 샛문을 밀고 들어섰다. 마당은 어두웠지만 건너편 창고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창고의 육중한 나무문을 젖히자 환한 안이 드러났다. 미곡 창고다. 양쪽에 쌓여진 쌀가마 사이의 공간에 세 사람이 있다. 두 어른과 소년 하나, 어른은 양성삼과 백천석 그리고 소년은 정완이다.

    나를 본 완이의 눈이 불빛에 반들거리고 있다. 다가선 내가 완이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완이 머리가 내 가슴에 닿는다.

    그때 백천석이 말했다.
    「10시 기차니까 지금 서울역으로 나가보겠습니다.」
    그때 완이가 내 옷깃을 움켜쥐었다.

    백천석과 완이는 이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떠나는 것이다. 신의주에서 둘은 다시 만주 땅으로 들어간다. 만주 땅에서는 박무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완아,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어깨를 당겨 안으며 말했더니 완이가 쥐었던 옷깃을 놓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젓는다.
    「싫습니다. 가겠습니다.」

    완이의 할머니는 지난달에 죽었다. 임종이 가깝다는 연락을 받고 완이를 보냈더니 나흘만에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혼자 놉을 사서 할머니를 산에 묻고 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미어진 내가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고 호통을 쳤지만 빈말인줄 모를 것인가?
    그 속 깊은 놈이 제 아비가 독립군으로 총살을 당한 집안이라 문상 오는 것도 꺼릴 줄을 다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더니 나에게 독립군이 있는 간도로 보내달라고 매일 조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완이가 머리를 들고 나를 보았다.
    「선생님, 여기 약도가 있습니다.」
    완이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손끝에 접혀진 쪽지를 쥐고 있다.

    쪽지를 받은 나에게 완이가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를 같은 곳에 나란히 묻었지요. 그 약도입니다.」
    그리고는 완이가 나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제가 당분간 못오게 될 터이니 부디 무덤이나 없어지지 않도록 해 줍시오.」
    「오냐, 이놈아.」

    내가 손을 뻗쳐 완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걱정 말거라. 박대장이 너를 아버지처럼 돌보아 줄 것이다. 내가 편지로 다 써놓았다.」

    숙연해진 백천석과 양성삼은 눈만 끔벅였고 완이의 말이 이어졌다.
    「모두 모르고 계셨지만 저는 아버지가 처형당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소리치신 말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완이의 부릅뜬 눈에서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심호흡을 한 완이가 말을 잇는다.
    「저는 아버지처럼 죽는 것이 소원입니다.」
    「살아야한다.」
    나는 내 목소리가 열에 뜬것처럼 느껴졌다. 창고 안은 추웠지만 온 몸에 열기가 뻗쳐졌기 때문이다.

    「꼭 살아서 다시 만나야 한다.」
    「에이, 가자꾸나.」
    하고 코가 막힌 목소리로 백천석이 말하더니 쌀가마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들었다.

    완이가 다시 나에게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선생님, 몸조심 하십시오.」
    「오냐.」

    목이 메인 내가 말을 잇지 못했고 양성삼이 완이의 어깨를 감싸 쥐고 같이 발을 떼었다.

    그렇게 완이와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