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장 식민지(植民地) ③  

     나는 귀국할 때 뉴욕 YMCA의 국제위원회로부터 서울 YMCA의 한국인 총무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미국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일본 정부가 모를 리가 없는 터라 신변 보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생계수단이 막막했던 나로서는 YMCA로부터 월급도 받게 되어서 당시로써는 일거양득이었다.
    일본관리가 되거나 일본 통치하의 조선 기관에 들어가 생계를 유지하느니 시골에서 닭이라도 기르고 살았을 것이다.

    귀국한 다음날 오전, 나는 서울 YMCA 회관 회의실 안에서 10여명의 친지, 관계자들과 함께 모여 앉았다.

    내 왼쪽에 한성감옥서 동지이며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낸 이상재(李商在)가 앉았고 오른쪽에는 서울 YMCA 미국인 총무이며 나를 총무로 추천해준 질레트(philip.L.Gillett)가 앉았다.

    이상재는 1850년생이니 나보다 25세나 연상인 당년 61세다.
    이상재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우남, 총독부에서는 자네의 귀국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걸세. 이젠 이곳이 우리가 계몽 운동을 한다면서 만민공동회 회원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던 시절이 아닐세.」

    말을 멈춘 이상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주름진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그때가 그래도 나았네. 지금은 서너명이 모여만 있어도 일본 군경한테 잡혀가고 반일(反日) 선동을 하면 그 자리에서 사살을 당한다네.」
    이것이 식민지 백성의 처지인 것이다.

    그러나 아직 겪지 못한 내가 눈만 껌벅였을 때 질레트가 말했다.
    「어제 총독부의 경무총장한테 불려갔지요.」
    방안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본 질레트의 조선어가 이어졌다.
    「이박사가 어젯밤에 도착하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곧 이박사를 불러 주의를 주겠지만 YMCA는 종교 단체라는 것을 명심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나는 쓴웃음만 지었고 둘러앉은 사람들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시의 경무총장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조선 주차헌병대장으로 부임했다가 총독부 경무총장으로 승진했는데 언론과 집회를 철저히 통제했다.

    수십개 신문이 정간, 폐간 당했으며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이란 단어를 삭제시켜 매일신보가 되었다.

    질레트가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
    「이박사, 경무총장 아카시가 당신을 직접 거명하고 경고를 한 겁니다. 주의해야 됩니다.」
    「그놈.」
    하고 입을 연 사람은 끝쪽에 앉은 주상호(周相鎬), 일명 주시경(周時經)이다.

    나하고 황해도 평산 동향이며 배재학당 동문, 협성회보도 같이 발간한 개혁동지, 그리고 내가 출옥 후에 상동청년학원도 같이 설립했던 한글학자다.

    주상호가 말을 잇는다.
    「그놈이 가장 악독한 놈이요. 우남, 조심해야 돼요.」

    나는 내 친구 주시경을 바라본 채 머리만 끄덕였다.

    주시경은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한글의 국어문법(國語文法)을 저술했다.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는 와중에도 세종대왕이 창조하신 조선인의 글자를 체계화시킨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애국 아니겠는가? 말과 글자가 살아있는 한 민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시경이 말한 적이 있다. 당장은 빛이 나지 않더라도 주시경은 음지에서 묵묵히 애국을 한다.

    이윽고 내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애써 돌아왔는데 금방 잡혀가면 되겠습니까? 당장에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묵묵히 일 하겠습니다.」

    주시경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만 질레트는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