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장 단련 ⑪  

     4월 8일, 그날은 역사학과 정치학 강의가 4시간이나 있었지만 나는 정신을 집중하지 못했다. 점심도 거른 나는 도서관에도 오래 앉아있지 못하고 교정을 거닐었다. 하버드 대학은 미국의 최고 명문대답게 학생들의 학구열이 대단하다.

    엘리엇 총장(Charles W. Eliot)은 나에게 교과과정이 어렵더라도 극복해낼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웅장한 건물들이 늘어선 하버드 야드를 걸으면서 나는 자꾸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어느덧 오후 5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이 아카마스의 생일이었고 이제 6시면 생일파티가 열릴 것이었다.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7시 반이었다. 나는 작은 1인용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1층의 공용 욕실과 화장실을 사용해야 되는 가장 싼 방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내가 책을 펴놓고는 책상에 앉은 채로 잠이 든 것 같다. 노크 소리에 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스터 리, 전보요.」
    다시 노크 소리와 함께 이제는 숙소 관리인 마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내가 방문을 열었더니 마크가 전보용지를 내밀었다. 전보용지를 받은 나는 문을 닫고 나서 바로 읽었다.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으므로 심호흡을 했던 기억이 난다.

    「급히 성 메리 병원으로 와 주세요. 아버지가 찾으십니다. 부탁드려요. 하루코.」

    나는 그 전보를 다섯 번도 더 읽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 용지가 눈앞에 생생하다. 전신국 직원이 갈겨쓴 글씨체도 기억난다.

    오후 9시 반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보스턴 역으로 달려가 워싱턴행 기차를 타야만 했는데 워싱턴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리는 노정이다. 그것도 지금은 밤이 아닌가? 그러나 정신을 수습한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숙소를 나왔는데 다행히 손님을 기다리던 마차를 탈수 있었고 새벽에는 워싱턴행 기차에 몸을 싣고 달리는 중이었다.

    하루코가 병원에서 오라고 하는 것은 한재복과 김일국의 거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한 것 같다. 아카마스가 살아서 나를 찾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나를 찾는가?
    그곳에 일본 대사관 직원과 미국 경찰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하루코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키겠는가? 나를 체포하려면 숙소로 직접 왔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거의 눈도 붙이지 못한 내가 워싱턴의 성 메리 병원으로 들어섰을 때는 다음날 오후 7시쯤 되었다. 안내소에서 아카마스의 병실을 물었더니 간호사가 안내를 했다.

    아카마스의 방은 2층이었는데 복도로 들어선 순간 나는 긴장했다. 동양인 대여섯명이 모여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모나 옷차림이 일본인이다.

    나를 본 그들도 긴장하더니 간호원과 함께 다가선 나에게 그 중 하나가 묻는다.   
    「당신 누구요?」
    일본말이다. 그쯤은 알아들었지만 나는 영어로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조센진.」

    옆쪽 사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사내 하나가 나에게 영어로 물었다.
    「혹시 하버드에서 오신 미스터리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아, 그럼 어서 안으로.」

    사내가 앞장서더니 입원실 문을 열고는 비껴섰다.

    입원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마악 이쪽으로 머리를 돌리는 하루코를 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하루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이 부풀려진 것이다.

    그때 침대에 누워있던 아카마스가 나를 보았다.